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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은 식생활조차 해결할 수 없는 딱한 형편에 두 칸 초가집은 곧 쓰러질 지경이었다.
17세에 결혼한 그녀는 쓸쓸하고 적막해 보이는 시가 집이 고생을 예고하는 듯한 불길한 감정에 휩싸여 쉽사리 정이 들지 않았다.
농토 한 뼘 없는 형편에 남편은 날마다 음주와 노름으로 방탕 생활을 계속하는가 하면 아예 며칠씩 집을 비우기가 예사였다.
가난과 남편의 방탕에 삶의 용기조차 잃었으나 노시부모(老媤父母)가 걱정이 되어 그럴 때마다 마음을 새로이 가지곤 했다.
시부모(媤父母)와 의논, 만주(滿洲)로 생활터전을 옮긴 그녀는 날품팔이와 삯 바느질 등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정착할 곳을 마련했다.
낮에는 힘겨운 노동으로 방에는 바느질로 다섯 식구를 혼자서 부양했으나 남편은 방탕 생활만 계속할 뿐 집안을 전혀 돌보지 않다가 일본(日本)으로 건너 갔다.
갖은 고생을 다하며 시부모(媤父母)를 지극히 공경해온 그녀는 시부모(媤父母)의 뜻에 따라 고향인 예천(醴泉)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은 어느 곳이든 마찬가지였다.
농번기에는 새벽부터 밤 낮도록 품팔이를 했으며 겨울철엔 삯 바느질로 밤을 지새우고 눈 덮인 산에 올라 땔감 나무를 해날라 시부모(媤父母)의 방을 따뜻이 했다.
해방을 맞아 귀국한 남편은 6.25사변 때 사별했으며 몇 년 뒤 시부(媤父)마저 세상을 떠났다.
잇따른 불행에도 삶의 용기를 잃지 않고 50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노력한 보람으로 2천 여 평의 논밭을 마련한 그녀는 자신도 노령이건만 시모(媤母)에 대한 효심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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