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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1964년 2월 23일)
독행상(篤行賞)
금릉군 귀성면 금평동 600
효부(孝婦) 김분남(金粉男) 38세
6·25동란 중에 남편을 사별(死別)하고 병든 시부(媤父)와 남매 등 4식구의 생계를 여자의 몸으로 떠맡아야 했다.
결혼 5년 만인 24살에 과부가 돼 청춘의 고독을 생활의 의지와 효심(孝心)으로 극복한 여장부이다.
박토인 밭 1반보(反步)로는 생계가 해결되지 않아 품팔이 등으로 수입을 얻어야 했다. 겨울철 농한기에 일거리가 없을 때는 산에 올라 땔나무를 거두어 팔기도 했으며, 베짜기 품팔이로 밤을 새우곤 했다.
시부(媤父)는 노환으로 자주 앓아 눕더니 어느 날 혼절한 채 회복하지를 못했다. 시부(媤父)를 살리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한 여름철 2개월 분 품값을 선불 받기도 하고 남아 있던 일부 가재도구를 팔아 정성으로 시부(媤父)를 치료했다.
어려운 보릿고개를 넘기면서도 그녀는 시부(媤父)에게는 언제나 쌀밥을 공양했으며 푸줏간 일을 자청해 맡아 임금(賃金) 대신 고기를 받아 시부(媤父)의 영양을 보살피기도 했다.
그녀의 효성(孝誠)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로 보상받게 됐다. 2년 동안 사경(死境)을 헤매던 시부(媤父)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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