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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형편(家庭形便)이 어려워 식당(食堂) 종업원(從業員)으로 일하던 박귀순(朴貴順) 여사(女史)는, 리어카를 끌고 매일(每日)같이 음식(飮食) 찌꺼기를 수거(收去)하러 다니는 한 맹인(盲人)의 끈질긴 집념(執念)에 감동(感動)이 되어 그와 결혼(結婚)하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21세(歲)였고, 앞 못 보는 남편(男便)은 박여사(朴女史)보다 무려(無慮) 17세(歲)나 연상(年上)인 38세(歲)였으며, 가정(家庭)에는 고희(古稀)가 넘은 노모(老母)가 노환(老患)으로 신음(呻吟)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그의 친구(親舊)들이 "무엇 때문에 그런 고생(苦生)과 불행(不幸)을 사서 하느냐.? 인간적(人間的)인 동정(同情)도 좋지만 맹인(盲人)과 어떻게 한 평생(平生)을 함께 할 것이냐?"고 말하면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이별(離別)해 버려라는 충고(忠告)가 빗발치듯 했지만, 그의 굳은 결심(決心)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를 부부(夫婦)의 유일(唯一)한 생활수단(生活手段)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편(男便)은 뒤에서 리어카를 밀고 자신(自身)은 앞에서 끌면서 이곳 저곳 음식점(飮食店)을 찾아다니는 것이 하루의 일과(日課)였는데, 거둬 모은 음식(飮食)찌꺼기는 개를 사육(飼育)하는 데에 필요(必要)로 했다.
박여사(朴女史)의 하루는 뼈를 깎는 아픔이었지만, 자신(自身)의 노력(努力)으로 남편(男便)에게 새 희망(希望)을 안겨 주게 되었다는 그 기쁨만으로도 행복(幸福)하기만 했고, 나아가 병(病)든 시모(媤母)님을 손수 간호(看護)해 주고 있음을 크나큰 보람으로 여겨, 그의 마음은 더 없이 즐겁고 기쁘기만 하였다.
그의 효성(孝誠)이 오죽 지극(至極)했으면, 오랫동안 병고(病苦)에 시달렸던 시모(媤母)님이 거짓말처럼 건강(健康)을 되찾았으랴.
그뿐이 아니었다. 해난사고(海難事故)로 사망(死亡)한 시숙(媤叔)의 네 자녀(子女)도 그가 맡아서 보살펴 주었는데, 연유(緣由)는 손위 동서(同壻)가 2남(男) 2녀(女)의 조카를 내 버리고 어디론가 가출(家出)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무거운 짐이 박여사(朴女史)의 두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는 조금도 불평(不平)하지 않고 마치 그가 낳은 자식(子息)들처럼 뜨거운 애정(愛情)으로 이들을 감싸 주었다.
어느덧 세월(歲月)은 흘러 큰 질녀(姪女)는 출가(出嫁)를 시켰고, 장질(長姪)은 회사(會社)에, 그리고 작은 질녀(姪女)는 미장원(美粧院)에서 직장생활(職場生活)을 하고 있으며, 막내는 중학교(中學校)에서 열심(熱心)히 공부(工夫)를 하고 있는데, 이들 조카들이 모두 훌륭하게 성장(成長)한 것은 박여사(朴女史) 부부(夫婦)의 피나는 노력(努力)과 애정(愛情)의 결실(結實)이라 하겠다.
박여사(朴女史)는 비단 가정(家庭)에서만의 효부(孝婦)요 열녀(烈女)가 아니라, 동리(洞里)에서도 자랑스러운 효부(孝婦), 열녀(烈女)로 존경(尊敬)을 받고 있는데, 특(特)히 이웃 돕기 운동(運動)이 전개(展開)될 때마다 솔선수범(率先垂範)하여 성금(誠金)을 거출(據出)하는 등 참여의식(參與意識)도 남달리 높았다.
앞 못 보는 남편(男便)을 위해 때로는 눈이 되고 손이 되고 발이 되기도 하면서, 그와 함께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 온 박여사(朴女史)야말로, 자신(自身)을 희생(犧牲)시켜 남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인간태양 (人間太陽)'이 아니고 무엇이랴. 예쁜 아내는 눈을 즐겁게 하고 어진 아내는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말도 있듯이, 지금껏 박여사(朴女史)는 남편(男便)과 시모(媤母)와 조카만을 위해 웃음꽃을 피워 준 지상(地上)의 천사(天使)였다고 해도 과언(過言)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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