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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흥(崔在興) 여사(女史)는 어려서부터 총명(聰明)하고, 정숙(貞淑)하여, 인근(隣近) 주민(住民)들로부터 비둘기 처녀(處女)라는 칭송(稱頌)을 받으며 자라오다가 그가 18세(歲) 때 출가(出嫁)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혼(結婚)한 지 얼마 후(後) 아들 내외(內外)는 슬하(膝下)에 무남독녀(無男獨女)밖에 없는 시숙모댁(媤叔母宅)으로 양자(養子)로 입양(入養)하게 되었다.
시숙모댁(媤叔母宅)은 가산(家産)이라곤 아무것도 없을 정도(程度)로 가난해서, 하루 해를 보리죽과 국수로 끼니를 이어갈 때가 많았다.
그러던 중 1938년(年) 여름, 남편(男便)은 돈벌이를 한답시고 기약(期約)도 없이 일본(日本)으로 훌쩍 떠나가고 집에는 시숙모(媤叔母)님과 그 여(女)의 자녀(子女) 남매(男妹)만이 남게 되었다.
그 때 최여사(崔女史)의 나이 불과(不過) 24세(歲)였는데, 우선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겠기에 낮에는 논밭에서 구슬땀을 흘려 일했고, 밤에는 삯바느질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갔다.
또 어떤 때는 산(山)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가 장에 내다 팔기도 하는 등, 생존(生存)을 위한 그의 몸부림은 눈물겹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숙모(媤叔母)님을 극진(極盡)히 모시면서 어린 자녀(子女)들의 뒷바라지도 빈틈없이 해 나갔다.
그러던 중 1961년(年)에는 엎친 데 덮친 격(格)으로 시숙모(媤叔母)님께서 중풍(中風)으로 눕게 되었는데, 그 날부터 최여사(崔女史)의 극진(極盡)한 간호(看護)가 뒤따랐다.
하루에도 몇 차례에 걸친 대소변(大小便) 받아내기와 목욕(沐浴), 빨래 등 시숙모(媤叔母)님의 손발이 되어 드렸다.
특(特)히 그는 밤마다 시숙모(媤叔母)님의 병(病)이 완쾌(完快)되기를 비는 간절한 기도(祈禱)를 올리는 지극(至極)한 정성(精誠)도 잊지 않았는데, 끝내 그의 따뜻한 간병(看病)의 보람도 없이 발병(發病) 3년(年)만에 타계(他界)하시고 말았다.
그 때 그는 "저의 불효(不孝)로 시숙모(媤叔母)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울부짖으면서 생전(生前)에 못다한 효(孝)를 못내 아쉬워했다.
최여사(崔女史)는 언제까지나 슬픔에만 젖어 있을 수가 없어, 다음 날부터 다시 낮에는 품삯 일을 했고, 밤에는 삯바느질,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홀치기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열심(熱心)히 일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자녀교육(子女敎育)에도 각별(各別)한 신경(神經)을 쏟아 왔는데, 아들은 그 후(後) 대학(大學)을 나와 공직(公直)에 근무중(勤務中)이며 딸은 얼마 전에 출가(出嫁)하여 행복(幸福)한 가정(家庭)을 꾸미고 있다.
이제 남은 일은 남편(男便)의 소식(消息)뿐이었는데, 헤어진 지 40년(年)이 지나도록 편지(便紙)한 장 없던 남편(男便)이 어느 날 갑자기 백발노인(白髮老人)이 되어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 순간(瞬間) 최여사(崔女史)는 이제 꿈인가 생시(生時)인가 할 정도(程度)로 너무나 기적(奇蹟)만 같은 일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결혼생활(結婚生活) 5년(年) 남짓 지난 뒤 집을 나간 후(後) 40년(年)만에 돌아왔으니, 세상(世上)에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어디 있으며, 이와 같은 기적(奇蹟)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남편(男便)은 과부(寡婦) 아닌 생과부(生寡婦)로 40년(年) 동안을 수절(守節)해 온 그의 부인(夫人) 최여사(崔女史)에게,
"미안(未安)하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오."라고 말하면서 눈물짓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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