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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금(全濟今) 여사(女史)는 1982년(年) 1월(月) 김천(金泉) 라이온스클럽에서 수여(授與)하는 장(壯)한 어머니 상(賞)과 역시 같은 해 5월(月) 응명 국민학교(國民學校) 학군단위(學群單位) 노인회장(老人會長)의 열녀상(烈女賞)을 받을 만큼, 그가 실행(實行)해 온 효행(孝行)과 열행(烈行)의 발자취는 너무나 훌륭하여 세인(世人)의 화제(話題)가 되고 있었다.
한 가정(家庭)의 주부(主婦)로서, 네 자녀(子女)의 장(壯)한 어머니로서, 또한 시모(媤母)님을 모시는 갸륵한 며느리로서 널리 알려진 전여사(全女史)는, 10여년전(餘年前)의 참극(慘劇)을 잊지 않고 있었으니 그것은 곧, 공사장(工事場)에서 일하다가 불의(不意)의 사고(事故)로 하반신(下半身)이 불구(不具)가 된 남편(男便)의 처절(悽絶)한 기억(記憶)이었다.
하루아침에 하반신(下半身)이 불구(不具)가 된 남편(男便)은 걷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고 휠체어에 신세(身勢)를 져야 하는 안타까운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가세(家勢)가 어려우니 김여사(金女史)가 남편(男便)을 대신(代身)해 가장(家長)구실도 해야만 했다.
"여보, 당신은 아무 걱정 말고 집에서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消日)하도록 해요. 모든 것은 제가 꾸려갈 테니 너무 걱정 말구요. 아시겠죠? 당신" 김여사(金女史)는 이와 같이 남편(男便)을 위로(慰勞)한 후(後) 그날부터 남의 집 품팔이, 채소장수, 모심기 등 닥치는 대로 억척스럽게 일하면서 어려운 가계(家計)를 근근 꾸려 나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시간(時間)틈틈이 남편(男便)을 휠체어에 태우고 바깥 바람을 쐬어 주기 위하여 외출(外出)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러 모로 어려운 그 환경(環境)속에서도 자녀(子女)들에게는 항상, 비록 가난은 하지만 정직(正直)하고 성실(誠實)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근면성(勤勉性)과 자립심(自立心)을 깊이 심어 주는 등 남달리 자녀교육(子女敎育)에도 정열(情熱)을 쏟았다.
네 자녀(子女) 모두가 중학과정(中學課程)을 마쳤는데, 그 어머니에 그 자녀(子女)들이라고나 할까, 네 자녀(子女)가 한결같이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를 하고 있다는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의 이야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소 김여사(金女史)는 노령(老齡)의 시모(媤母)님을 어찌나 정성(精誠)스럽게 봉양(奉養)하는지, 그를 가리켜 효부중(孝婦中)의 효부(孝婦)라는 찬사(讚辭)가 붙을 정도였다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시모(媤母)님은 노령(老齡)인 탓으로 분별(分別)없이 아무 때나 어느 곳에서나 방뇨(放尿), 방분(放糞)하는 일이 예사로웠지만, 전여사(全女史)는 조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눈에 보는 쭉쭉 오물(汚物)을 깨끗이 처리(處理)하곤 하였으니, 자녀(子女)들도 어머니의 효심(孝心)을 닮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특(特)히 밤마다 시모(媤母)님이 외로우실까봐 네 자녀(子女)로 하여금 교대(交代)로 할머니방에 가서, 재미있는 책을 읽어 드리도록 배려(配慮)하는 등 그의 효성(孝誠)은 이렇게 세심(細心)한 곳까지 빈틈이 없을 정도(程度)였다.
'근면성실(勤勉誠實)'이란 네 글자를 가훈(家訓)으로 삼고 있다는 전여사(全女史)는, 오늘도 남편(男便)을 휠체어에 태우고 바삐 외출(外出)을 서두르고 있었으며, 그의 자녀(子女)들을 서로가 다투어서 할머니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면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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