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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自身)의 한 몸을 희생(犧牲)시켜 모친(母親)의 병간호(病看護)를 해 온 갸륵한 여성(女性)이 바로 이계남(李系男) 여사(女史)이다.
그는 지금껏 나이 40세(歲)에 이르도록 미혼녀(未婚女)로서 생활(生活)하고 있는데, 그가 걸어온 발자취는 눈물겹기만 했다.
그러니까 지난 1976년(年)부터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수족(手足)을 못쓰는 병환(病患)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결혼(結婚)하기 위해 마련해 두었던 돈으로 식당(食堂)을 경영(經營)하면서 하루에도 몇 만(萬)원씩의 약(藥)값을 조달(調達)하였다.
사범대학(師範大學)까지 졸업(卒業)한 그가 궂은 일을 하는 식당(食堂)을 경영(經營)하기까지엔 대단한 결심(決心)이 필요(必要)했던 것이다. 그 녀(女)의 결심(決心)은 다음과 같았다.
'하루에 몇 만(萬)원이 들어가는 약(藥)값을 조달(調達)하기 위해선 결혼(結婚)이고 뭐고 모두 뒤로 미루고 끊임없는 약(藥)값을 조달(調達)할 수 있는 장사를 해야 한다. 그 길만이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길이다.'
그 날부터 그 녀(女)는 군위(軍威), 의성(義城), 안동(安東), 대구(大邱) 등 도내(道內) 곳곳을 누비면서 좋은 약(藥)을 구(求)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어디 그뿐이랴, 밥도 조석(朝夕)으로 떠먹여 드렸고, 하루 몇 차례에 걸쳐서 대소변(大小便)도 손수 받아내면서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봉양(奉養)하였다.
"혼기(婚期)를 몇 차례나 넘기면서 오직 어머니 병간호(病看護)에만 전념(專念)하고 있는 그 녀(女)는, 대학(大學)을 나온 여성(女性)답지 않게 불평(不平) 한 마디 없이 밤이나 낮이나 병석(病席)을 지키고 있는데, 그 정경(情景)이야말로 흐뭇하다 못해 한 폭(幅)의 아름다운 그림만 같았다."라고 그를 지켜본 인근주민(隣近住民)의 말대로, 이여사(李女史)는 근래(近來)에 보기 드문 효녀(孝女)중(中)의 효녀(孝女)였다. 병간호(病看護)와 가족(家族)들을 생계(生計)를 위해 자기(自己) 한 몸을 던져 버린 그는, 어머니를 대신(代身)해서 가장(家長) 구실도 훌륭하게 해 오고 있는데, 따뜻한 그의 보살핌으로 동생들 모두가 대학(大學)에서 공부(工夫)하리 만큼 그의 숨은 뒷바라지는 눈물겹기만 했다.
그녀(女)의 따뜻한 간호(看護)의 보람도 없이 그의 어머니가 발병(發病) 8년(年)만에 세상(世上)을 떠나자, 이여사(李女史)는 애통(哀痛)의 정(情)을 누르면서 조금도 좌절(挫折)하지 않고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더욱 극진(極盡)하게 해 주었다.
40 고개를 바로 눈앞에 둔 그에게 결혼(結婚)은 언제쯤 할 계획(計劃)이냐고 누가 묻기라도 하면, "이 다음 하늘나라에 가서 결혼(結婚)할 거예요. 들러리는 선녀(仙女)들이 서 줄 테니 얼마나 멋져요?"라고 거리낌없이 대답(對答)하였다.
오늘도 이여사(李女史)는 식당(食堂)으로 나가기 전(前)에 어머님 사진(寫眞) 앞에 인사를 드리고 나가는데, 그의 지극(至極)한 효심(孝心)은 이렇듯 어머니 생전(生前)이나 사후(死後)에나 조금도 변(變)함이 없었다.
동생들에게 '충·효·예(忠·孝·禮)'의 세 글자를 가훈(家訓)으로 이어 주고 싶다는 이여사(李女史)는, 밤늦게 돌아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寫眞) 앞에 '반필면(反必面)'을 꼭 하는 효녀(孝女)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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