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손태흥(孫泰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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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1985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칠곡군 왜관읍
효자(孝子) 손태흥(孫泰興) 27세

손태흥씨(孫泰興氏)는 비록 하급자(下級者)이긴 했지만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공무원(公務員)으로, 상관(上官)으로부터는 사랑을, 그리고 동료(同僚)들로부터는 존경(尊敬)을 한 몸에 받아오면서 근무(勤務)해 왔다. 

고등학교(高等學校) 시절 신문배달(新聞配達)을 하면서 집안 일을 도와 온 그는 대학진학(大學進學)을 포기 한 채 약관(弱冠) 20세(歲)에 지방공무원(地方公務員) 7급(級) 시험(試驗)에 합격(合格)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1979년(年) 8월(月) 충주(忠州)에 거주(居住)하시는 부친(父親)이 중풍(中風)으로 쓰러져 병석(病席)에 눕게 됐을 때, 공무(公務)에 매인 몸인데도 불구하고 1주일(週日)에 2~3회(回)에 걸쳐 충주(忠州)까지 왕래(往來)하면서 중풍(中風)에 좋다는 온갖 약(藥)을 구(求)해 드리기도 했으며, 특(特)히 추운 겨울에도 솔방울을 따다가 꿀에 쟁여 즙을 내어 드리는 등, 그의 정성(精誠)스러운 효행(孝行)은 끝이 없었다. 

공무(公務)에 시달리고 간병(看病)에 지쳐 버린 손씨(孫氏)는 , 마침내 그 자신(自身)도 1개월간(個月間) 휴양(休養)해야 한다는 병원(病院) 의사(醫師)의 충고(忠告)도 있었지만, 자신(自身)의 건강(健康)은 뒤로 제쳐두고 1982년(年) 9월(月) 그의 부친(父親)이 별세(別世)할 때까지,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해 왔다. 

부친(父親)이 별세(別世)하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좌절감(挫折感)에 빠지기도 했지만, 다시 용기(勇氣)를 가다듬고 오직 근검절약(勤儉節約)을 생활(生活)의 지표(指標)로 삼으면서 가사(家事)일을 도맡아 이끌어 갔다. 

소아마비증(小兒痲痺症)인 그의 형(兄)이 중(中)·고(高)·대입(大入) 검정고시(檢定考試)에 차례로 합격(合格)한 후(後) 충북대학(忠北大學)에 입학(入學)할 수 있게 된 것도, 아우인 손씨(孫氏)의 뜨거운 자기(自己) 희생적(犧牲的)인 성원(聲援) 때문이었고, 하나뿐인 여(女)동생이 국가공무원(國家公務員) 9급(級) 시험(試驗)에 합격(合格)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숨은 뒷바라지 덕택(德澤)이었다. 

그 후(後) 손씨(孫氏)는 어머니를 그가 거주(居住)하고 있는 칠곡군(漆谷郡)으로 모시고 와서 타인(他人)의 밤나무 밭을 지켜주는 대가(代價)로 다섯 마지기의 농토(農土)를 소작(小作)하면서 10여리(餘里) 길을 출퇴근(出退勤)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사별(死別)한 부친(父親)에게 못다한 효성(孝誠)을 홀어머니에게 듬뿍 바쳤는데, 예(例)를 들면 출근(出勤)할 때는 반드시 어머님께 아뢰고 돌아와서는 꼭 문안(問安) 인사(人事)를 드리는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의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잊지 않고 실천(實踐)했으며, 밤에는 아무리 피곤(疲困)해도 모친(母親)이 잠들기 전(前)에는 절대로 먼저 자리에 눕지 않는 등, 세심(細心)한 일에 이르기까지 그의 효심(孝心)이 닿지 않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지난 1984년(年)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오갈 데 없는 71세(歲)의 노파(老婆)가 철로변(鐵路邊)에 무허가(無許可) 건축물(建築物)을 짓다가 행정당국(行政當局)에 적발(摘發)되었을 때, 이것을 보다 못한 손씨(孫氏)는 사비(私費)로 설계도(設計圖)를 작성하여, 정당(正當)하게 허가(許可) 절차(節次)를 받아 집을 짓도록 주선(周旋)해 준 일도 있었다. 

그 때 그 노파(老婆)가 얼마나 고마웠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저 청년(靑年)은 지방공무원(地方公務員)이 아니고 국가공무원(國家公務員)도 아닌 인간공무원(人間公務員)이야."라고. 

손태흥(孫泰興氏)야말로 경로효친(敬老孝親)의 실천자(實踐者)이며, 남을 위해 헌신봉사(獻身奉 仕)하는 자랑스러운 모범청년(模範靑年)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