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김만적(金萬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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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1985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고령군 다산면
효자(孝子) 김만적(金萬迹) 41세

예로부터 우리 나라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란 칭송(稱頌)을 받아 왔다. 

그러나 시대(時代)가 변(變)하고 사회생활(社會生活)이 바뀌어짐에 따라 우리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이었던 경로사상(敬老思想)은 점점 쇠퇴(衰頹)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事實)인데, 바로 그 경애사상(敬愛思想)을 조금도 더럽힘 없이 실천(實踐)해 오고 있는 효자(孝子) 중의 효자(孝子)가 있으니, 그가 곧 금년(今年) 41세(歲)의 김만적씨(金萬迹氏)이다. 

7세(歲)때 부친(父親)과 사별(死別)한 김씨(金氏)는, 6000여평(餘坪)의 전답(田畓)에다 목숨을 걸고 살아오면서 노모(老母)를 극진히 봉양(奉養)해 왔는데, 지금껏 단 한번도 모친(母親)의 말을 거역(拒逆)해 본 일이 없을 만큼 그의 효심(孝心)은 옥(玉)과 같이 맑고 아름다웠다. 

"그 사람, 노모(老母)가 추운 겨울에도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면, 발가벗고 물에 뛰어들어가서 물고기를 잡아다가 어머니에게 바칠 사람이다." 

어느 인근주민(隣近住民)의 이 같은 말 그대로, 그는 마음으로 효(孝)를 다 바쳤고, 또한 몸으로도 효(孝)를 다해 온 그야말로 효(孝)의 참 실천자(實踐者)였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이름을 알 길 없는 병(病)으로 그의 노모(老母)가 몸져 눕게 되었다. 

그 날부터 김씨(金氏)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좋다는 약(藥)은 모두 구(求)해다가 복용(服用)토록 했지만 병세(病勢)는 더욱 악화(惡化)될 뿐이었다. 

김씨(金氏)는 그 후(後) 대구직할시(大邱直轄市) 남구(南區) 지역(地域)에 있는 어느 큰 병원(病院)에 노모(老母)를 입원(入院)시킨 후, 화원(花園)에서 병원(病院)까지 20여리(餘里)의 거리(距離)를 매일같이 자전차(自轉車)로 왕래하면서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간병(看病)했다. 

낮에는 농사(農事)일을 한 후(後) 밤마다 병원(病院)을 찾아와서 간병(看病)을 지도 어언 4개월(個月), 밤마다 꼬박 지켜 앉아서 간병(看病)해 온 그의 정성(精誠)이 얼마나 놀라왔던지, 그를 지켜본 원장(院長)이나 간호원(看護員)마저도 찬사(讚辭)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모친(母親) 곁에 꼭 지켜 앉아서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는 등, 그의 효성(孝誠)이 얼마나 지극(至極)했으면 같은 병실(病室)의 환자(患者)들이 질투(嫉妬)까지 했겠는가?"라는 동민(洞民)의 극찬(極讚) 그대로, 병원내(病院內)의 환자(患者)들도 부러워할 만큼 그의 효심(孝心)은 뜨겁기만 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나 할까, 마침내 병세(病勢)도 호전(好轉)되어 퇴원(退院)하게 되었는데, 퇴원(退院)하는 날 이들을 마중하기 위해 마을 주민(住民) 모두가 마을 어귀까지 나와 우렁찬 박수(拍手)로 맞아 줄 만큼 김씨(金氏)의 효행(孝行)은 마을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었다. 

그날부터 김씨(金氏)는 노모(老母)가 다시 또 어떤 병마(病魔)에 말려들까 봐, 평소 기침소리만 나도 노모(老母)의 방(房)으로 뛰어들어가 문안(問安)을 드리는 등, 세심(細心)한 배려(配慮)로 노모(老母)를 극진히 봉양(奉養)하였다. 

이러한 김씨(金氏)는 노모(老母)에게뿐만 아니라, 마을 노인(老人) 누구에게나 그가 지닌 효심(孝心)을 골고루 나누어 줄 정도로, 경로사상(敬老思想)을 몸소 실천(實踐)을 통해 보여 준 효자중(孝子中)의 효자(孝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