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박병화(朴秉花)

페이지 정보

본문

제28회(1985년 4월 17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경북 울진군 기성면
효부(孝婦) 박병화(朴秉花) 49세

우리 선조들은 효를 인륜도덕의 근본으로 삼아, 사람마다 이를 숭상하고 집집마다 이를 생활화하여 이것이 풍속이 되고, 관습이 되어, 우리의 전통적 미풍양속으로 토착화됐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삼척동자라도 부모에 효도하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도를 알고,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충효를 생활의 근본으로 삼을 줄 알았던 것이다. 

부모에 대한 효성은 천륜이 아니고서는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 효행이라고 하나, 사람이 평소에 효에 대한 교육을 받아 효행의 당위성을 알고, 또한 다른 이의 효도하는 실제를 본받게 될 때에 비로소 누구나 효행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효도하는 마음은 곧 선행을 하게 하는 동기가 될 뿐만 아니라, 국가사회에 대한 충성심을 유발하는 계기도 될 것이다. 여기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임을 실천을 통해 보여 준 효부중의 효부가 있으니, 그 주인공이 바로 당년 49세의 박승화 여사이다. 

박 여사는 21세 때 2세 연하인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세인 안병상씨와 결혼을 했는데 가산이라곤 다 쓰러져가는 집 한 채 뿐이었고, 그나마 생활은 남의 농사를 소작하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며, 그 위에 양(養)시부모님까지 그가 모셔야만 했다. 그뿐이면 그래도 괜찮을 터인데, 시집온 다음 날부터 그를 울린 것은 철없는 10대 남편의 행동과 양시부님의 괴팍스러운 성격이었다. 웃어른으로서 가사 일을 간섭하는 것은 당연지사이겠지만, 별다른 일도 아닌데 폭언을 퍼부을 땐 죽고 싶도록 괴롭기만 했던 것이다. 시종일관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고 지극한 효성으로 받들어 모셨다. 

그러던 중, 시부님이 바깥 출입도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약해지자, 무료함을 달래 드리기 위해, 박 여사가 매일같이 시부님을 업고 친지 집으로 다니면서 즐거운 기분으로 소일 할 수 있게 힘쓰기도 했다. 인근주민들은 그의 갸륵한 행실을 보고, “그의 지극한 효심에 정말 놀았다. 여자의 몸으로 부끄러움 없이 남자를 업고 다니는 것도 가상한 일이지만,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저토록 따뜻하게 봉양하는 일도 처음 보는 일이다. 말이 쉽지 저렇게 행동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주민의 말 그대로 박 여사의 효행은 놀랍기만 했지만, 끝내 시탕(侍湯), 봉양한 보람도 없이 그의 시부님은 71세를 일기로 영면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시모님 또한 노쇠하여, 정신마저 혼미하고, 시력 또한 밝지 못한 데다 중풍까지 겹쳐 반신불수의 중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렇다. 시부님께 못다한 효성을 시모님께 바쳐야 한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그날부터 박 여사는 중풍에 좋다는 약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한편, 입에 맞는 음식을 마련해 드리는 등, 모든 정성을 한 곳으로 모아 극진히 구환했다. 어디 그뿐이랴, 지금껏 20여 년 동안 매일같이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항상 방 안도 청결을 유지했고, 하루건너 한 번씩 목욕도 시켜 드리는 알뜰한 정성을 바쳤다. 

이와 같은 어렵고 짜증스러운 고역이, 긴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계속되었지만, 그는 오늘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단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고 오직 묵묵히 효행의 길만을 걸어왔다. 

특히 시모님의 무료함을 달래 드리기 위해서 매일 밤 고담(古談)책이나 전설들을 읽어 드리기도 했고, 또한 꼬박 밤을 새우면서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는 등 그의 정성스러운 효심은 온 면내에 메아리쳐, 마침내 1983년 5월 울진군수로부터 자랑스러운 효부상을 받기도 했다. 

별세한 시부님한테도 그랬지만, 양시모님 역시 친시모님 이상으로 극진히 봉양하고 있는 그의 극진한 효성에 동민들은 끝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세상에 박 여사와 같은 효부는 다시 없을 것이다. 친시부모님도 아닌 양시부모를 친시부모 이상으로 섬겨 온 박 여사야말로 인간애의 산 표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리 효도와 우애는 인(仁)의 근본이라고 말하지만, 저토록 사랑과 봉사를 다하고 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동민들의 찬사 그대로 그의 시모님은 지금껏 92세가 되도록 박 여사의 따스한 손길이 없었던들 오늘의 장수를 누려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20여 년간 병휴(病休)에서 보내는 몸이긴 하지만, 그의 시모님도 박 여사의 고마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시중을 들 때마다 감동에 넘친 눈물로 감사하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평생을 남의 소작농을 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장남과 장녀는 각각 전문대학을 졸업시켰고, 둘째 아들은 정규대학 1학년에, 그리고 셋째 아들은 고등학교에 진학시키는 등, 5남매 모두를 훌륭하게 키우고 가르쳐서 주민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고 있으며, 더욱이 그 부모에 그 자녀들이란 말로 칭송이 자자하다.

박 여사는 자녀들에게 항상 입버릇처럼, 

“충효정신은 우리 조상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피와 땀으로 갈고 닦아 우리 후손에게 물려 준 유산이며 보배이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 찾아볼 수 있는 효자문, 효녀문, 그리고 역사와 소설을 통해 수없이 들을 수 있는 효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 등은, 우리 마음에 그러한 도덕관을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는데, 만에 하나라도 너희들은 이 도덕관을 무너뜨리는 일이 없도록 항상 충효의 두 글자를 머리에 새겨 두면서 인생을 살아가도록 해라.”고 타이르면서 가르쳤다. 

이렇듯 박 여사의 충효관은 확고하였다. 양시부모님을 20여 년간 극진한 효성으로 봉양한 보람이 꽃피어 이제는 화목한 가정을 이룩하게 됐고, 피땀어린 노력으로 삶의 터전도 굳건하게 닦아지게 되었다. 

“보래이, 아가야. 내 이다음 저승에 가면 너를 다시 며느리로 삼을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노?” 이 말은 어느 날, 괴팍스럽기만 했던 그의 양시모님이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박 여사에게 던진 진심에서 우러나온 한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