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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歲)의 어린 나이에 결혼(結婚)한 장명출(張命出) 여사(女史)는, 시백부(媤伯父)님과 시부(媤父)님, 시모(媤母)님, 시(媤)동생과 시(媤)누이 등 그야말로 층층시하(層層侍下)의 대가족(大家族)을 봉양(奉養)해야만 하는 중책(重責)을 걸머지고 결혼생활(結婚生活)이 시작되었다.
전답(田畓)이라야 고작 1,000여평(餘坪)뿐이어서 시집온 그 날부터 가난을 행복(幸福)으로 삼키면서 산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6.25사변(事變)으로 입대(入隊)한 남편(男便)이 19세(歲) 꽃다운 나이에 전사(戰死)했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비보(悲報)만은 어린 마음에도 참아낼 길이 없었다.
따라서 장여사(張女史)는 결혼(結婚) 2년(年)만에 남편(男便)의 전사통지(戰死通知)만 받고, 슬하(膝下)에 핏줄 하나 없이 17세(歲) 때부터 평생(平生)을 수절(守節)하며 시(媤)어른들과 시댁(媤宅)을 위해 희생(犧牲)해 온 열부(烈婦)이자 효부(孝婦)라고 할 수 있겠다.
“눈 딱 감고 개가(改嫁)를 해라. 나이 불과(不過) 열 일곱에 과부(寡婦)가 되다니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꽃다운 청춘(靑春) 썩히지 말고 재혼(再婚)의 길을 찾도록 해라.” 그를 아끼는 친지(親知)들이 이와 같이 개가(改嫁)할 것을 진심(眞心)으로 타일렀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시댁(媤宅)을 위해서 봉사(奉仕)하다가 죽기로 굳게 결심(決心)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불행(不幸)은,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한 것 하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일(後日) 다시 잇달아 이어여 시백부(媤伯父)님의 별세(別世)와 시부(媤父)님의 타계(他界)로 더욱 큰 충격(衝擊)을 맞이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내가 부족(不足)한 탓이다. 나의 불효(不孝)로 어른들이 돌아가셨다’라고 자책(自責)하는 장여사(張女史)는 그로부터 지금까지 초하루, 보름의 삭망전(朔望奠)과 조석상식(朝夕上食)을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실행(實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媤)동생과 시(媤)누이 등 6남매(男妹)를 혼자 키워 모두 출가(出稼)시키는 한편, 7남매(男妹)에 달(達)하는 질녀(姪女)와 조카들에 이르기까지 친자식(親子息) 이상(以上)으로 돌보아 주어, 인근주민(隣近住民)들로부터 '고아원장(孤兒院長)'이란 별명(別名)까지 듣기도 하고 있다.
40년(年)이 넘도록 관광(觀光) 한 번 해 본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노시모(老媤母)님에 대(對)해서도 말대꾸해 본 적이 없는 벙어리 아닌 벙어리 주부(主婦)로서, 특(特)히 입양(入養)시킨 아들이 연탄(煉炭)가스 사고(事故)로 죽음 직전(直前)에 이르고, 또한 간암(肝癌)으로 시(媤)동생마저 세상(世上)을 버렸을 때는 노시모(老媤母)님마저 커다란 충격(衝擊)을 받을까봐, 이런 사실(事實)들을 감쪽같이 숨겨 오면서 미수(米壽)에 이른 지금까지 효성(孝誠)을 다하고 봉양(奉養)해 오고 있다.
전쟁미망인(戰爭未亡人)들이 더러는 새 삶의 길을 택(擇)하기도 했지만, 그 녀(女)만은 40여(餘)년간(年間) 청상(靑孀)으로 늙어오면서 희생(犧牲)과 봉사(奉仕)로 시댁(媤宅)을 지켜 왔다.
이와 같은 공로(功勞)로 대한노인회(大韓老人會) 경상북도연합회(慶尙北道聯合會)로부터 효부(孝婦)상(賞)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공검면장(恭儉面長)이 수여(授與)하는 효행상(孝行賞), 그리고 성균관(成均館) 유도회(儒道會)로부터 효부상(孝婦賞)을 받는 등, 장여사(張女史)의 숨은 효행(孝行)은 하늘도 감탄(感歎)할 정도이며 이러한 그의 숭고(崇高)한 부덕(婦德)은 상주(尙州郡)의 자랑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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