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김교선(金敎仙)

페이지 정보

본문

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칠곡군 약목면
효부(孝婦) 김교선(金敎仙) 40세

10년간(年間)을 하루같이 중풍환자(中風患者)인 시부(媤父)님을 정성(精誠)껏 간병(看病)해 온 갸륵한 효부(孝婦)가 있으니 그가 곧 김교선(金敎仙) 여사(女史)이다. 

그의 남편(男便) 장병용씨(張炳鏞氏)는 차남(次男)이었지만 부모(父母)님을 모셔야만 했는데, 김여사(金女史)도 이에 대한 이의(異議)는 없었지만 자신(自身)의 힘으로 중풍환자(中風患者)인 시부(媤父)님을 잘 봉양(奉養)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큰 걱정이었다. 

'최선(最善)을 다해서 구환(救患)에 전심전력(全心全力)해 보자,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했는데, 설마 효성(孝誠)을 다하면....'

김여사(金女史)는 이와 같이 마음을 가다듬고, 그 날부터 시부(媤父)님 곁에 꼬박 지켜 앉아서 정성(精誠)껏 간호(看護)했다. 

우선 그는 시간표(時間表)에 의(依)해서 물리운동(物理運動)을 시켜 드렸고, 수시(隨時)로 동내(洞內)를 산책(散策)시켜 드리면서 노인정(老人亭)과 경로당(敬老堂)등에 모시고 가기도 했다. 

해마다 개최(開催)되는 경로(敬老)잔치에도 빠짐없이 모시고 간 그는, 매일(每日)같이 정화수(井華水)를 떠 놓고 시부(媤父)님의 병환(病患)이 하루 속히 회복(回復)되기를 간곡히 기원(祈願)하는 정성(精誠)도 잊지 않을 만큼 김여사(金女史)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은 시부(媤父)님 병환(病患)의 쾌유(快瘉)뿐이었다. 

때로는 병(病)에 좋다는 약초(藥草)를 캐기 위해 깊은 산중(山中)을 헤매다가 낭떨어지에서 뒹굴어 죽을 고비를 넘긴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다. 

"세상(世上)에 그렇게 착한 효부(孝婦)는 다시 없을 거야. 어떤 때는 시아버지를 손수 등에 업고 경로당(敬老堂)까지 모시고 가기도 했는데, 남자(男子)도 아닌 연약(軟弱)한 여자(女子)의 몸으로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디 그 뿐인가. 매일(每日)같이 시간표(時間表)를 짜놓고 팔다리 운동(運動)을 시키고 있는 그의 끈덕진 집념(執念)은 정말 고개가 수그러질 정도였다. 기동(起動)도 못하던 그의 시부(媤父)님께서 지금에 와서는 바깥 출입(出入)도 할수 있을 만큼 몸이 좋아졌는데, 그게 모두 며느리 덕분(德分)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이 마을 어느 노인(老人)의 말처럼 김여사(金女史)의 눈물겨운 뒷바라지로 마침내 그의 시부(媤父)님은 절망(絶望)속에서 희망(希望)을 되찾았고, 병환(病患)도 완쾌단계(完快段階)에 이를 정도로 회춘(回春)의 기쁨을 맛보게 됐으니, 세상(世上)에 이런 기적(奇蹟)이 또 어디 있으랴. 

"며느리의 지극(至極)한 간호(看護)가 없었던들 나는 벌써 오래 전(前)에 이 세상(世上)을 떠났을 것이다. 지금의 나를 보라. 내가 어디 기동(起動)도 못했던 중풍환자(中風患者)같은가? 며느리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에 눈시울이 뜨거워질 뿐이다." 

시부(媤父)의 이 같은 탄사(歎辭) 그대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였다. 김여사(金女史)는 비단 시부(媤父)님께뿐만 아니라, 시모(媤母)님에 대(對)해서도 며느리가 아니고 딸 자식(子息) 이상(以上)으로 극진한 마음으로 효성(孝誠)을 다 바치니, 마을에서는 그를 가리켜 효부중(孝婦中)의 효부(孝婦)라고 칭송(稱頌)의 소리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고만 있다. 

'언행일치(言行一致)'란 네 글자를 가훈(家訓)으로 정해 두고 있다는 김여사(金女史)는, 그의 가훈(家訓) 그대로 말과 행동(行動)이 언제나 하나 같았다는 것이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의 칭송(稱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