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채영주(蔡英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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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경산군 경산읍
효부(孝婦) 채영주(蔡英珠) 44세

5년전(年前)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한 채영주(蔡英珠) 여사(女史)에게는, 고희(古稀)를 맞은 시부(媤父)님과 다섯 살에서 열 살까지의 자녀(子女) 2남(男) 2녀(女)의 무거운 짐이 그의 두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남편(男便)일 잃은 채여사(蔡女史)는 당장 생계(生計)의 위협(威脅)을 받아 얼마 동안은 굶는 일을 밥먹듯 해 오다가, 이웃집 전답(田畓)과 과수원(果樹園)에서 품삯일을 하면서 근근 연명(延命)하는 길을 찾게 됐다. 

그리하여 겨우 입에 풀칠은 하게 됐으나 불행(不幸)하게도 어느 날 시부(媤父)님이 슬레트 지붕을 손질하다가 실수(失手)로 낙상(落傷)하여 하루 사이에 바깥 출입(出入)을 못하는 딱한 처지(處地)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채여사(蔡女史)는 생계(生計)를 위해 막노동(勞動)하는 일과 한편으로 시부(媤父)님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면서 구환(救患)에 힘써야 하는 일 등, 두 가지 어려운 일을 매일(每日)같이 이겨내면서 살아야만 했다. 

다음 날부터 채여사(蔡女史)는 품삯 일을 하다가도 때만 되면 집으로 달려가 시부(媤父)님의 점심(點心)을 차려 드리고 용변(用便)도 처리(處理)하는 등, 바삐 보살핀 다음 다시 작업(作業現場)으로 달려가 일을 하곤 했다. 

그를 지켜본 어느 주민(住民)은 그의 갸륵한 행실(行實)을 이렇게 극찬(極讚)했다. 

“하루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그 날도 채여사(蔡女史)는 시부(媤父)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 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폭우(暴雨)를 맞으면 감기(感氣)의 위험(危險)도 있으니 오늘 하루는 그만두라고 했지만, 채여사(蔡女史) 는 고개를 저으며 집으로 달려가 온갖 시중을 끝낸 다음에야 다시 작업(作業現場)으로 돌아왔다. 예상(豫想)한 그대로 채여사(蔡女史)는 독감(毒感)에 걸려서 많은 고생(苦生)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自身)의 독감(毒感)보다도 집으로 달려가 시부(媤父)님을 대(對)하고 돌아온 기쁨이 더 컸기 때문에, 독감(毒感)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할 정도(程度)였으나, 세상(世上)에 이렇게 기특(奇特)한 효부(孝婦)가 어디 있겠는가?" 어느 주민(住民)의 칭찬(稱讚) 그대로 채여사(蔡女史)는 효부중(孝婦中)의 효부(孝婦)였다. 

더욱이 그는 억지로 떠맡은 반장직(班長職)까지 수행(遂行)해야만 했는데, 우선 그는 매주(每週) 수요일(水曜日)을 '마을 청소(淸掃)의 날'로 정(定)해 놓고 꾸준히 계도(啓導)한 결과, 오늘날에 와서는 경산군내(慶山郡內)에서 모범반(模範班)이 될 만큼 이웃과 이웃 간(間)의 단합(團合)을 그의 힘으로 이룩 해 놓았다. 

“자립(自立)하겠다는 정신(精神)과 용기(勇氣)가 있고, 생산(生産)해 내겠다는 마음의 자세(姿勢)와 노력(努力)만 있다면 아무리 어렵게 생각되었던 일도 쉽게 해결할 수 있고, 구차한 살림도 풍족(豊足)한 생활(生活)로 향상(向上), 발전(發展)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채여사(蔡女史)는 그 자신(自身) 말보다 실천(實踐)을 통하여 반장(班長)의 임무수행(任務遂行)을 반원(班員)들에게 보여 주고 있었는데, 그의 꿈은 경산군내(慶山郡內)에서 '일등(一等班)'을 이룩하는 것이 소망(所望)이라고 했다.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1985년(年) 5월(月) 경산군수(慶山郡守)로부터 효행표창(孝行表彰)을 받기도 한 채여사(蔡女史)는 ‘자조(自助)·자립(自立)·협동(協同)’을 반(班)의 지표(指標)로 삼고 있는 모범(模範班長)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