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박복남(朴福男)

페이지 정보

본문

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천군 고경면
효부(孝婦) 박복남(朴福男) 45세

1982년(年) 5월(月) 뜻 깊은 어버이날을 맞아, 영천군수(永川郡守)로부터 효부상(孝婦賞)까지 받기도 한 박복남(朴福男) 여사(女史)는 영천군(永川郡)이 낳은 효부(孝婦)라 하겠다. 

충효(忠孝)의 미덕(美德)을 인생(人生)의 지표(指標)로 삼고 살아온 박여사(朴女史)는, 오늘도 중풍환자(中風患者)인 시부(媤父)님을 위해 알뜰한 정성(精誠)을 다 바쳐 간병(看病)에 임(臨)하고 있는데 특히 그는 하루의 모든 시간(時間)을 시부(媤父)님을 위해 바치고 있을 만큼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마을 전체(全體)에서 화제(話題)가 되고 있었다. 

비근(卑近)한 예(例)로 외출(外出)을 할 때나 외출(外出)에서 귀가(歸家)했을 때는 '출필고(出必告), 반필면(反必面)'의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잊지 않았으며, 특히 외출(外出)에서 돌아올 때는 시부(媤父)님이 좋아하는 간식(間食)을 꼭 사들고 들어와 대접(待接)하는 등 그의 지극한 효심(孝心)은 자상(仔詳)하기도 했다. 

"박여사(朴女史)는 1남(男) 4녀(女)의 어머니이기도 한데, 자녀(子女)들에게도 '출필고(出必告) 반필면(反必面)'의 예절(禮節)을 꼭 지키도록 교육(敎育)시키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녀(子女)들도 어머니 못지않게 할아버지를 섬기는 효심(孝心)이 한결같이 두터웠다."라는,  그의 가족(家族)을 눈 여겨 본 인근주민(隣近住民)의 말 그대로, 박여사(朴女史)가 집을 비울 때는 그 자녀(子女)들이 서로가 다투어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고 있었다. 

동장(洞長)인 남편(男便)을 대신(代身)해서 혼자 힘을 농사(農事)일을 꾸려가고 있는 박여사(朴女史)는, 억척스러운 농군(農軍)이기도 하였다. 

오죽했으면 그를 가리켜 '오뚜기 여사(女史)'란 별명(別名)까지 붙였으랴.  

"박여사(朴女史)는, '오뚜기 여사(女史) 중(中)에서도 으뜸가는 오뚜기'였다. 밤에도 시부(媤父)님께 좋다는 약쑥을 캐기 위해서 들판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몇 번이나 목격(目擊)했다. 남자(男子)도 아닌 여자(女子)의 몸으로 겁도 없이 산(山)과 들을 헤매면서 약초(藥草)를 캐 온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오뚜기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박여사(朴女史)를 잘 알고 있는 어느 인근 주민(隣近住民)의 말이었다. 

때로는 자녀(子女)들의 학비(學費)를 마련하기 위해 억척스러운 품팔이를 하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노동(勞動)으로 번 일당(日當)으로 시부모(媤父母)님이 좋아하는 찰떡을 사다 드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웃 할머니들이 모여서 노는 곳을 찾아가, 손수 만든 떡을 나눠 주는 등 노인(老人)을 공경(恭敬)하는 마음이 두텁기만 하였다. 또한 박여사(朴女史)는 마을을 사랑하고 아끼는 애향심(愛鄕心)도 남달랐는데, 특히 매월(每月) 실시(實施)하는 반상회(班常會)에 단 한 사람의 동민(洞民)도 빠지는 일이 없도록 적극적(積極的)인 독려(督勵)와 계몽(啓蒙)을 한 보람으로, 지금에 와서는 모범반(模範班)으로 발돋움하였다. 

“큰 일을 앞세우고 눈에 보이는 성과(成果)만을 생각하기보다는 작은 일에 힘을 기울이고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을 기꺼이 행(行)하는 성실(誠實)한 노력(努力)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박여사(朴女史)는 동리(洞里)의 궂은 일도 앞장서 도맡아 처리(處理)하는 아름다운 오뚜기이며 또한 경로효친(敬老孝親)의 산 표본(標本)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