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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歲)에 결혼(結婚)한 김임순(金任順) 여사(女史)의 시집살이는, 정신박약(精神薄弱)에다 하반신불구(下半身不具)인 손위 시숙(媤叔)과 노령(老齡)에 접어든 시부모(媤父母)를 모셔야 하는 어려운 살람살이가 시작되었다.
시댁(媤宅)에서는 시모(媤母)님을 제외(除外)하고는 시부(媤父)님이나 그의 부군(夫君)까지 식물인간(植物人間)만 같은 시숙(媤叔)의 존재(存在)가 귀찮아서 그에 대한 정신적(精神的), 육체적(肉體的) 학대(虐待)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야, 이 놈아! 귀(貴)한 양식(糧食) 한 알이라도 축내지 말고 어서 콱 죽어 버려라. 넌 차라리 사는 것보다는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왜 몰라, 이 놈아!” 시부(媤父)님이 이렇게 한 마디 내던지면 남편(男便)도 질세라 한 마디 내뱉는다. 그럴 때마다 김여사(金女史)는 시숙(媤叔)이 너무나 불쌍한 나머지 자신(自身)도 모르게 눈물짓곤 하였다.
'저럴 수는 없다. 힘 닿는 한(限) 내가 도와 주자. 한 인간(人間)의 귀중(歸重)한 생명(生命)을 저렇게 학대(虐待)할 수가 있는가? 하물며 자신(自身)들의 핏줄을 나누어 가진 혈육(血肉)들이 아니냐!'하며 속으로 다짐하고, 그 날부터 김여사(金女史)는 손수 시숙(媤叔)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고 겉옷과 속옷까지 갈아 입혀 주면서 넘치는 인간애(人間愛)와 박애정신(博愛精神)으로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그의 남편(男便)과 시부(媤父)님은 오히려 그와 같은 김여사(金女史)의 병(病)구완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지나친 친절(親切)을 삼가라고 위협(威脅)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거룩한 인간애(人間愛)는 더욱 더 타오르기만 하였다.
"김여사(金女史)가 시숙(媤叔)에게 베푼 인간애(人間愛)는 범인(凡人)의 경지(境地)를 넘어 숭고(崇高)하고 눈물겹기만 했다.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외면(外面)하는 오줌똥을, 손수 받아내는 그 일 하나만 보아도 그의 인간애(人間愛)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그를 지켜본 인근주민(隣近住民)의 말 그대로, 김여사(金女史)야말로 형제(兄弟友愛)의 참 표본(標本)이었다.
그러던 중에 노환(老患)으로 시부(媤父)님까지 몸져 눕게 되니, 김여사(金女史)는 안방과 웃방을 번갈아 드나들면서 시부(媤父)님과 시숙(媤叔)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야 하는, 그야말로 형언(形言)키 어려운 기막힌 경우(境遇)를 겪는 딱한 처지(處地)에 놓이게 됐다. 눈만 뜨면 간병(看病)으로 하루 일과(日課)를 치러야만 하는 김여사(金女史)는, 때로는 그 자신(自身)이 피로(疲勞)에 지쳐 쓰러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조금도 내색(內色)하지 않고 어른을 간병(看病)에만 전념(專念)하였다.
그러나 그의 지극(至極)한 간호(看護)의 보람도 없이 발병(發病) 6년(年)만에 시부(媤父)님이 돌아가시고, 이어서 4년후(年後)에는 시모(媤母)님마저 시름시름 앓다가 타계(他界)하였다.
몇 년(年) 사이에 시부모(媤父母)님을 모두 잃어버린 김여사(金女史)는, 두 어른들이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고 별세(別世)한 것을 자신(自身)의 불효(不孝)와 못난 부덕(婦德)으로 돌리고 자책(自責)하면서 못다한 정성(精誠)을 불구(不具)인 시숙(媤叔)에게 쏟아왔다.
그러면서 슬하(膝下)의 4남매(男妹)에게도 효행(孝行)의 참뜻을 몸소 실천(實踐)을 통해 수범(垂範)하고 있다.
효제(孝悌)를 다하는 풍형적(豊形的)인 한국(韓國)의 여인상(女人像)이 있다면, 그가 바로 김여사(金女史)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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