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박경란(朴京蘭)

페이지 정보

본문

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1986년 4월 16일
효부(孝婦) 박경란(朴京蘭) 28세

자식(子息)이 부모(父母)에게 불효(不孝)하고 패륜(悖倫)하는 일, 사제지간(師弟之間)에 있어야 할 경로사상(敬老思想)의 결여(缺如), 형제지간(兄弟之間)에 멀어지는 우애(友愛), 연장자(年長者)와 연하자(年下者)사이에 애정(哀情)과 미풍(美風)이 없어지는 일, 부모(父母)가 자식(子息)을 학대(虐待)하여 파륜(破倫)하는 일 등등이 모두가 전통적(傳統的)인 우리 민족고유(民族固有)의 윤리관(倫理觀)과 도덕관(道德觀)을 파괴하는 비인간적(非人間的)인 행위(行爲)에 속하는데, 특히 연약(軟弱)한 부인(夫人)을 학대(虐待)하면서 가정(家庭)마저 돌보지 않는 남편(男便)이 있다면, 이것 역시 용납(容納)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가난한 농가(農家)에 시집은 박경란(朴京蘭) 여사(女史)도 바로 그 피해자(被害者)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시(媤)집을 때만 해도 기동(起動)이 자유(自由)스럽지 못한 시부(媤夫)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거기다 매일(每日)같이 술타령과 외박(外泊)으로 가정(家庭)을 팽개치고 바깥만 나돌아다니는 남편(男便)이 있었으니 난처(難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운명(運命)으로 돌리고 남편(男便) 대신 농사(農事)에 전념(專念)하면서 시부(媤父)님의 병간호(病看護)에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을 바쳤다. 

그의 이와 같은 정성(精誠)도 아랑곳 없이 남편(男便)의 무관심(無關心)은 도(度)를 더해 갔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박여사(朴女史)는 벙어리 냉(冷)가슴 앓듯, 혼자서 속을 썩히면서 시부(媤父)님 뒷바라지에 온갖 심혈(心血)을 기울여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하였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면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나 할까. 박여사(朴女史)의 극진한 간호(看護)로 마침내 그의 시부(媤父)님은 건강(健康)을 되찾아 마을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빛을 찾게 되었고, 이에 감동(感動)한 남편(男便)도 마음을 고쳐먹고 새 사람이 되었다. 

그의 남편(男便)은 그 동안 거칠어진 아내의 손을 잡고 자신(自身)의 지난날을 뉘우치면서, 비록 잘 살지는 못하지만 작은 행복(幸福)을 위해서 함께 합심협력(合心協力)하리라는 굳은 연맹(聯盟)도 잊지 않았다. 

“박여사(朴女史)가 아니었던들 그 집안은 다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 때는 그의 시아버지의 병(病)만큼이나 가세(家勢)가 기울어진 일도 있었지만, 박여사(朴女史)의 노력(努力)으로 건강(健康)도 회복되고, 가세(家勢)도 회복되었으니, 박여사(朴女史)야말로 그 집안의 보배라고 해도 과언(過言)은 아니다."라는 어느 인근주민(隣近住民)의 극찬(極讚)그대로, 시부(媤父)에 대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했기 때문에 술독에 빠져 있었던 남편(男便)도 감동(感動)한 나머지 새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오죽했으면 그의 남편(男便)도 이런 말을 했으랴. 

”여보, 당신은 우리 집안의 구세주(救世主)였으니 오늘부터 무엇이든 당신(當身)이 시키는 대로 하리다." 박여사(朴女史)가 지닌 효(孝)의 개념(槪念)은 다음과 같았다. 

'풍욕정이풍불지 자욕양이친불대(風慾靜而風不止,恣慾養而親不待)' 즉(卽) "나뭇가지 고요하려 해도 바람이 아니 그쳐 주고, 자식(子息)이 봉양(奉養)하려 해도 어버이 아니 기다려 주시네”라고 박여사(朴女史)는 이와 같이 주석(註釋)까지 붙이면서 효행(孝行)은 부모(父母)님이 생존(生存)해 계실 때 다하는 것이 도리(道理)라고 두 번 세 번 강조(强調)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