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사공인적(司空寅迹)

페이지 정보

본문

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군위군 군위읍
효부(孝婦) 사공인적(司空寅迹) 75세

소꿉장난과 고무줄넘기 등으로 한창 천진난만(天眞爛漫)하게 뛰놀 나이에 결혼(結婚)한 사공인적(司空寅迹) 여사(女史)는 그의 나이 불과(不過) 15세(歲) 때 꽃 가마를 타고 시집갔는데, 시집간 첫날부터 가난을 밥 먹듯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남편(男便)과 더불어 품팔이와 막노동(勞動) 등으로 그날 그날의 생계(生計)를 근근 이어가긴 했지만 내일(來日)에 대(對)한 희망(希望)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여보, 우리 이렇게 가난하게 살 게 아니라, 당신(當身)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뭔가 고정수입(固定收入)이 될 수 있는 직업(職業)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이대로 가면 입에 풀칠은커녕 깡통차기가 안성맞춤 이겠어요." 

남편(男便)에게 이와 같이 제의(提議)한 사공여사(司空女史)는, 비록 나이는 어리긴 했지만 생활(生活)에 대한 감각(感覺)은 남달리 예민(銳敏)했다. 이들 부부(夫婦)는 생각 끝에 남편(男便)은 구직차(求職次) 바다 건너 일본(日本)으로 떠났고, 그 자신(自身)은 대구방직공장(大邱紡織工場)에서 여공생활(女工生活)을 시작했다. 

그 후(後) 일본(日本)에서 얼마간 부쳐 온 돈과, 직공생활(職工生活)을 해서 푼푼이 모은 돈으로 400여평(餘坪)의 전답(田畓)을 마련하는 큰 기쁨까지 맛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기쁜 속에 난데없는 비보(悲報)가 날아왔으니 그것은 곧 남편(男便)이 1년(年)만에 귀국(歸國) 도중(途中) 객사(客死)를 했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전문(電文)이었다. 

따라서 사공여사(司空女史)는 결혼(結婚) 2년(年)만에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하게 됐고, 17세(歲)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되었으니 세상(世上)에 이런 기막힌 비극(悲劇)이 또 어디있으랴. 

“아까운 나이 썩히지 말고 좋은 배필(配匹)을 만나서 개가(改嫁)를 해라. 인생(人生)이란 두 번 있는게 아니라 단 한 번뿐이다.” 그를 아끼는 친지(親知)들과 이웃 주민(住民)의 이와 같은 재혼(再婚)의 권유(勸誘)에도 그의 대답(對答)은 시댁(媤宅) 고수(固守)라는 말 한 마디뿐이었다. 

그 후(後) 사공여사(司空女史)는 양자(養子)를 맞아들여 노시모(老媤母)님과 함께 굳건히 살아가던 중, 이번에는 월남전(越南戰)에 참가(參加)한 양자(養子)가 전사(戰死)했다는 비보(悲報)를 접(接)하게 됐다. 

어디 그뿐이랴. 노시모(老媤母)님도 중풍(中風)으로 눕게 되는 연거푸 역경(逆境)을 맞게 되어, 그 날부터 눈물겹도록 힘겨운 뒷바라지가 잇따랐다. 어떨 때는 대소변(大小便)을 이부자리와 온 방(房)안에 풀칠을 하듯 더렵혀 놓은 때도 비일비재(非一非再)했지만, 그는 조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하루에 몇 차례씩이나 목욕(沐浴)을 시켜 드리는가 하면, 때로는 시모(媤母)님을 등에 업고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가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문자(文字) 그대로의 출천지효부(出天之孝婦) 바로 그것이었다. 

10여년간(餘年間)의 지성(至誠)스런 보살핌도 외면(外面)한 채 시모(媤母)님은 별세(別世)하시고, 그 후(後) 사공여사(司空女史)는 홀로 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새마음갖기운동(運動)에 앞장서는 등, 남은 여생(餘生)을 여성계몽사업(女性界蒙事業)에 이바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