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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자(李榮子) 여사(女史)의 남편(男便) 이용식씨(李龍植氏)는 숙부(叔父)집에 양자(養子)로 입적(入籍)되어 있어서, 그를 낳아 주신 양친(兩親)과 그를 길러 주신 양부모(養父母)를 동시(同時)에 봉양(奉養)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立場)에 놓여 있었다.
양가(兩家)를 동시(同時)에, 그것도 똑같은 비중(比重)으로 차별(差別)없이 모셔야 한다는 부담감(負擔感)과 책임의식(責任意識)이 이여사(李女史)의 두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는 조금도 불평(不平)하는 일 없이 온갖 정성(精誠)과 바른 예절(禮節)로 비둘기 가족(家族)처럼 다정(多情)한 분위기(雰圍氣)를 조성(造成)하는 데 전심전력(全心全力)하였다.
그러던 중 시부(媤父)님이 중풍(中風)으로 눕게 되었고, 거기에다 73세(歲)의 고령(高齡)인 양시부(養媤父)님까지 중풍(中風)으로 병상(病床)의 몸이 되어, 양가(兩家)를 왕래(往來)하면서 병간호(病看護)를 해야 하는 곤경(困境)에 빠지게 됐다.
그 날부터 이여사(李女史)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양가(兩家)를 드나들면서 환자(患者)들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고 식사(食事) 시중을 드는 등 그야말로 정성(精誠)을 기울여 봉양(奉養)했다.
그러나 효성(孝誠)어린 병간호(病看護)의 보람도 없이 와병(臥病) 6년 후(年後)에 시부(媤父)님은 타계(他界)하셨고, 애통(哀痛)의 눈물도 채 마르기 전(前)에 2년(年) 후(後)에는 76세(歲)의 시모(媤母)님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世上)을 떠나는 슬픔을 겹쳐 맞게 되었다.
지금은 양시모(養媤母)님마저 노환(老患)으로 눕게 되매, 이여사(李女史)는 결혼(結婚)한 그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도 병석(病席)을 떠나 본 일이 없을 정도(程度)로, 그는 병간호(病看護)를 위해 이 세상(世上)에 태어난 사람마냥, 사랑과 자기(自己) 희생(犧牲)으로 숨은 '나이팅게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여사(李女史)는 시집온 첫날부터 양가(兩家) 시(媤)어른들의 병간호(病看護)만을 위해 생활(生活)해 왔다. 고등학교(高等學校)까지 마친 현대여성(現代女性)인데도 단 한 마디의 불평(不平)을 하는 것을 못 보았다."
이와 같은 인근주민(隣近住民)의 말 그대로, 이여사(李女史)는 말이 없는 행동가(行動家) 이여사(李女史)의 효행(孝行)은 가정(家庭)에만 머물지 않았다.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푼푼이 저축(貯蓄)한 돈으로 벽시계(壁時計) 1점(點), 선풍기 1점(點),연탄(煉炭) 100장 등, 9만(萬)원 상당(相當)의 선물(膳物)을 '자산노인회(老人會)'에 전달(傳達)하여 경로(敬老) 효친사상(孝親思想)의 시범(示範)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새마을 운동(運動)에도 앞장서고 있는 이여사(李女史)는, 그 자신(自身) 1남(男) 1녀(女)로 가족계획(家族計劃)을 한 후(後) 가족계획(家族計劃)에 대한 필요성(必要性)과 실천방법(實踐方法)을 부녀회원(婦女會員)에게 계몽설득(啓蒙說得)하여 많은 실적(實績)을 올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근검절약(勤儉節約)을 생활(生活)의 지표(指標)로 정(定)하고 1,000만(萬)원 달성목표(達成目標)를 세워 현재(現在) 500여만(餘萬)원을 마을 금고(金庫)에 저축(貯蓄)하는 등 남다르게 억척스러운 면(面)을 보여 주기도 했다.
“쓰고 남은 돈을 저축(貯蓄)하려 할 것이 아니라 저축(貯蓄)하고 남는 것을 소비(消費)하는 태도(態度)를 길러야 한다.”고 말하는 이여사(李女史).
언젠가 한 번 저축왕(貯蓄王)의 꿈을 이룩하는게 그의 소원(所願)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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