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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수(文台壽) 여사(女史)가 박씨(朴氏) 문중(門中)으로 시집온 후(後)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단락(團樂)하게 살아오던 이 가정(家庭)에 1977년(年) 5월(月) 시부(媤父)님이 중풍(中風)으로 역경(逆境)과 고난(苦難)의 거친 파도(波濤)가 일기 시작했다.
시부(媤父)님이 기동불능(起動不能)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자, 문여사(文女史)는 잠시(暫時)도 곁을 떠나지 않고 시부(媤父)님의 손발이 되어 정성(精誠)껏 시봉(侍奉)해 왔다.
중풍(中風)으로부터 재기(再起)시킬 수 있는 명의(名醫)의 명약(名藥)을 구(求)하기 위해 백방(百方)으로 뛰어다녀 보았지만 남편(男便)의 적은 봉급(俸給)에 가계(家計)만이 더욱 위축되어갈 뿐 병세(病勢)는 좀처럼 해서 물러설 줄을 몰랐다.
그러나 문여사(文女史)는 조금도 실망(失望)하지 않고, 언젠가는 꼭 건강(健康)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信念)으로 매일(每日)같이 대소변(大小便)을 손수 받아내면서 극진히 간호(看護)에 임(臨)하였다.
5년여(年餘)의 긴 간병(看病) 기간중(其間中) 외출(外出) 한 번 하지 않을 정도(程度)로 오직 시부(媤父)님 곁에만 지켜 앉아 있었으니 세상(世上)에 이런 지성(至誠)스러운 효부(孝婦)가 또 어디 있으랴.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1979년(年) 10월(月)엔 시모(媤母)님마저 중풍(中風)으로 쓰러져 시부(媤父)님 병석(病席) 곁에 나란히 눕는 비운(悲運)을 맞게 됐다.
순간 문여사(文女史)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絶望感)에 자신(自身)도 쓰러질 뻔했지만, 이런 때일수록 정신(精神)을 차려야 되겠다는 굳은 의지(意志)로 불철주야(不撤晝夜) 시부(媤父)님과 시모(媤母)님을 구환(求患)하는 일에만 전심전력(全心全力)했다.
하루의 시간(時間)이 오히려 부족(不足)할 정도로 매일(每日)같이 바쁜 나날을 보낸 문여사(文女史)는, 자그마치 8년(年)이란 긴 세월(歲月)을 하루같이 한 마디의 불평(不平)도 없이 간병(看病)에만 전념(專念)해왔다.
그러나,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의 보람도 없이 지난 1984년(年) 10월(月)에 시부(媤父)님은 타계(他界)하시고 말았다.
그러자 시모(媤母)님만이 간병(看病)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1985년(年) 12월(月) 하순 경(下旬頃) 어느 날이었다. 첫눈이 내리는 바깥 경치(景致)가 보고 싶다는 시모(媤母)님 말씀에 문여사(文女史)는 그를 등에 업고 골목길에 나서는 순간(瞬間) 영판(永板)에 미끄러져 팔다리 골절상(骨折傷)으로 입원(入院)하는 비극(悲劇)이 따랐다.
그러나 문여사(文女史)는 병원(病院)에서 1주일(週日)만에 완치(完治)되지 않은 상태(狀態)에서 퇴원(退院)했으니, 그 이유(理由)는 '시모(媤母)님을 누가 돌볼 것인가?'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한다.
“팔다리가 불편(不便)한 환자(患者)가 환자(患者)를 돌봤다고나 할까, 문여사(文女史)의 이러한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눈물겹기만 하였다.”라는 그를 지켜본 인근주민(隣近住民)의 말 그대로, 문여사(文女史)는 오늘도 불편(不便)한 몸을 이끌고 시모(媤母)님 방(房)을 드나들면서 대소변(大小便) 처리(處理)를 하는 등 모든 구환(救患)에 바쁜 일과(日課)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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