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학교(學校)에서는 품행(品行)이 단정(端整)하면서 부지런한 모범(模範學生)으로 그리고 가정(家庭)과 마을에서는 믿음직스러운 효녀(孝女)로 알려진 김경현양(金炅炫孃)은, 5년전(年前)에 부친(父親)과 사별(死別)하고 행상(行商)으로 어려운 생계(生計)를 이어가는 모친(母親) 슬하(膝下)에서 언니 오빠와 함께 살고 있다.
행상(行商)으로 식구(食口)들을 겨우 연명(延命)케 하고 있는 그의 모친(母親)이 몇 차례에 걸쳐 과로(過勞)와 잡병(雜病)으로 쓰러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김양(金孃)은 몇 밤이라도 꼬박 새우면서 간호(看護)에 임(臨)했을 뿐만 아니라, 건강(健康)에 좋다는 각종(各種)나무뿌리와 약초(藥草)를 캐기 위해 어린 몸으로 깊은 산중(山中)을 헤맨 일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내가 눈 여겨 본 것만도 20여(餘) 차례도 넘었을 만큼 학교(學校)길에서 돌아오기가 바쁘게 호미를 들고 산(山)으로 쫒아가더라,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한밤중에 비를 흠뻑 맞고 산중(山中)에서 내려올 때도 있더라.” 그를 지켜본 인근주민(隣近住民)의 말 그대로 어린 김양(金孃)의 효성(孝誠)은 어린 천사(天使)와도 같았다.
비단 김양(金孃)은 효심(孝心)만이 깊은게 아니라, 내 고장을 사랑하고 아끼는 애향심(愛鄕心) 또한 남달리 두터웠다. 예(例)를 들면 월(月) 3회(回) 정기적(定期的)으로 실시(實施)하는 조기청소(早起淸掃)에 앞장서서 비를 들고 나서는가 하면 정초(正初)에는 온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웃어른들에게 세배(歲拜)를 드리는 등 예의범절(禮儀凡節)을 다함에도 항상 앞장서 오고 있다 한다.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마침내 어머니가 병석(病席)에서 일어나던 날 김양(金孃)이 너무나 좋아하면서 춤까지 둥실둥실 추는 바람에, 그 광경(光景)을 바라다본 동민(洞民)들은 일제히 우렁찬 박수(拍手)를 보내기도 했다 한다.
1983년(年) 10월(月) 학교장(學校長)으로부터 효행표창(孝行表彰)을 받기도 한 김양(金孃)은, 비단 가정(家庭)에서뿐만 아니라, 학교생활(學校生活)에 있어서도 남보다 일찍 등교(登校)해서 궂은 일을 모두 도맡아 한 후(後) 다른 학생(學生)보다 늦게 귀가(歸家)하는 일이 일쑤였으며 특히 학습(學習雰圍氣) 조성(造成)과 자율학습(自律學習)에 솔선수범(率先垂範)하는 등 언제나 담임(擔任)선생(先生)님의 칭찬(稱讚)을 독차지했다.
그는 어린 여학생(女學生)이었지만 경로사상(敬老思想)의 실천(實踐)을 생활화(生活化)함으로써 우리 고유(固有)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을 되살려 사회도의(社會道義)를 앙양(昻揚)하고 경애(敬愛)와 신의(信義)에 뿌리박은 새로운 도의사회건설(道義社會建設)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나름대로의 확고(確固)한 신념(信念)을 밝히기도 했다.
'사랑과 봉사(奉仕)'란 다섯 자(字)를 영원(永遠)한 좌우명(座右銘)으로 삼고 싶다는 김양(金孃)은, 마침 일요일(日曜日)을 맞아 어머니와 행상(行商)을 다소(多少)나마 도와 드리기 위해 그 자신(自身)도 행상(行商)길에 함께 따라나서는 갸륵한 정성(精誠)을 다하는 착한 소녀(少女)이기도 했다.
- 이전글제29회 독행상(篤行賞) 이복자(李福子) 25.06.10
- 다음글제29회 독행상(篤行賞) 유만춘(柳萬春) 25.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