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김경란(金景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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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경주시 동천동
효녀(孝女) 김경란(金景蘭) 26세

1년(年) 365일(日)을 매일(每日)같이 어버이날로 생각하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효성(孝誠)을 다 바치고 있는 갸륵한 효녀(孝女)가 있으니, 그 녀(女)가 바로 김경란양(金景蘭孃)이다. 

김양(金孃)은 비록 찢어지는 가난으로 초등학교(國民學校) 이상(以上)의 문턱은 넘지 못하였지만 단 한 마디의 불평(不平)도 없이 조모(祖母)님을 위해 알뜰한 효녀(孝女) 구실을 다하고 있는 모범여성(模範女性)이다. 

몇 가지 사례(事例)를 들어보면 동맥경화증(動脈硬化症)으로 우측대퇴부(右側大腿部)를 절단(切斷)한 후(後)에도 직장(職場)을 지켜야 하는 부친(父親)이 출퇴근(出退勤)할 때마다 1.5K가 넘는 거리(距離)를 매일(每日)같이 택시로 모셔다 드렸을 뿐만 아니라, 퇴근(退勤)할 때는 문(門)밖에서 기다렸다가 다시 모시고 오는 등, 그의 효성(孝誠)스러운 사랑의 지팡이는 동리(洞里)와 직장(職場)에서 화제(話題)가 될 정도였다. 

“택시길이 막힐 때는 손수 부축을 해서 직장(職場)까지 모시고 간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할 만큼 김양(金孃)의 효성(孝誠)은 지극(至極)하기만 했다. 흙탕길이 있을 때는 힘겹게 등에 업고 간 일도 있었으니 그의 효성(孝誠)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를 지켜본 인근주민(隣近住民)의 말 그대로 김양(金孃)은 누가 보나 현대판(現代版) 심청(深靑)이었다. 

그러던 중, 노동(勞動)으로 생계(生計)를 도와 오던 오빠마저 객지(客地)인 포항(浦項)에서 교통사고(交通事故)로 입원(入院)하게 되자 김양(金孃)의 어머니는 부득이(不得已) 오빠의 병간호(病看護)를 위해 출타(出他)하게 되었는데, 이 때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78세(歲)에 달(達)한 노조모(老祖母)님마저 병환(病患)으로 눕게 되었다. 

그러나 김양(金孃)은 이중삼중(二重三重)으로 덮친 고난(苦難)과 역경(逆境)도 아랑곳 않고, 한 손은 부친(父親)의 지팡이가 되는 등 그의 뜨거운 효심(孝心)은 끝이 없었다.

“밤낮없이 환자(患者) 병(病)구완만 하다가 시집은 언제 가겠느냐?”는 물음에 김양(金孃)은 “아버지가 정년퇴직(停年退職)을 하시는 오는 6월(月)까지 결혼(結婚)을 보류(保留)하기로 했다.”고 말하면서, 자신(自身)의 결혼(結婚)보다도 하루 속(速)히 온 식구(食口)들의 건강(健康)이 회복(回復)되기만을 빌고 있었다. 

오늘도 부친(父親)과 더불어 출근(出勤)길에 같이 나선 김양(金孃)은 집을 나서기 전(前)에 조모(祖母)님이 조금도 불편(不便)함이 없도록 보살핀 후에 대문(大門)을 나서는 등 그의 세심(細心)한 배려(配慮)는 탄복(歎服)할 정도였다. 

집에 있을 때는 조모(祖母)님 곁에 꼬박 지켜 앉아서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기도 했고, 시간(時間) 틈틈이 포항(浦項)에 입원 중(入院中)인 오빠에게도 달려가서 간병(看病)하고 돌아오는 김양(金孃)은 단 하루도 편히 쉴 날이 없을 정도(程度)로 그의 손길은 바쁘기도 하고 또한 천사(天使)의 손길이기도 하였다. 

김양(金孃)은 이렇듯 갸륵한 효성(孝誠)은, 오늘날 자신(自身)만의 평안(平安)을 희구(希求)하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감화(感化)를 주는 효(孝)의 산 교본(校本)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