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백규철(白奎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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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대구직할시 북구 칠성동
효자(孝子) 백규철(白奎哲) 17세

교내(校內) 선행표창장(善行表彰狀) 5회(回), 과학기술처장관상(科學技術處長官賞), 경북체신청장상(慶北遞信廳長賞), 울진군교육장상(蔚珍郡敎育長賞), 국민의원상(國民議員賞), 대한적십자사장학금(大韓赤十字社獎學金) 수령(受領), 초등학교(國民學校) 6년(年) 우등상(優等賞), 6년(年) 개근상(皆勤賞), 중학(中學) 3년(年) 개근상(皆勤賞)과 우등상(優等賞)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표창장(表彰狀)과 상장(賞狀)을 받은 바 있는 백규철군(白奎哲君)은, 수상(受賞) 경력(經歷)이 말해 주고 있듯이 성광고등학교(聖光高等學校)가 자랑하는 모범학생(模範學生)이다.

75세(歲)의 조부(祖父)님과 우편물(郵便物) 집배원(集配員)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成長)한 백군(白君)은, 어릴 때부터 효자(孝子)라는 말을 들을 정도(程度)였고, 또 총명(聰明)하였는데, 그의 효심(孝心)은 1984년(年) 6월(月) 교통사고(交通事故)로 입원(入院)한 아버지 구환(救患)에서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비록 규모(規模)는 작았지만 토요일(土曜日) 오후(午後)와 일요일(日曜日)에는 200여평(餘坪)의 농토(農土)를 손수 가꾸는 한편, 아버지 병간호(病看護)에도 전심전력(全心全力)하였는데, 특(特)히 백군(白君)은 아버지의 담당(擔當) 구역(區域)을 자전차(自轉車)를 타고 다니면서 아버지 대신(代身) 편지(便紙)와 전보(電報)를 배달(配達)해서, 주민(住民)들로부터 많은 찬사(讚辭)를 받았다. 

“어른들도 힘겨운 우편배달(郵便配達)을 완전무결(完全無缺)하고 책임(責任)있게 수행(遂行)하는 것을 보고 감탄(感歎)했다. 한창 뛰놀 나이에 그런 일을 하고 있으니 정말 대견스럽기만 하다." 그를 지켜본 어느 주민(住民)의 말 그대로 백군(白君)은 학교(學校)에서나 가정(家庭)에서나 모범생(模範生)이었다. 

모친(母親)이 생계(生計)에 보탬을 하기 위해 먼 일터로 나갈 때는, 현장(現場)까지 꼭 자전차(自轉車)로 모셔가고 모셔 오는 알뜰한 효성(孝誠)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형제간(兄弟間)의 두터운 우애(友愛)도 백군(白君)이 가교(架橋)를 구성을 하여, 언제나 웃음꽃을 피우면서 화목(和睦)하게 지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가상(可賞)한 일인가.

백군(白君)은 학교생활(學校生活)에 있어서도 언제나 자기(自己)의 학급(學級)이 전교(全校)에서 최상(最上)의 모범반(模範班)이 되도록 노력(努力)하였으며 점심 때 도시락을 지참(持參)하지 못한 동급생(同級生)이라도 발견(發見)되면, 자신(自身)의 도시락으로 우정(友情)을 함께 나누는 등 남달리 애향심(愛鄕心)도 깊었다. 

“궂은 일을 모두 도맡아서 한 만큼 학급(學級)을 위(爲)해서는 언제나 십자가(十字架)를 짊어지곤 했다. 백군(白君)은 한 마디로 표현(表現)해서 훌륭한 학생(學生)이었으며 아울러 자랑스러운 지도자(指導者)였다."라는 담임선생(擔任先生)의 칭찬(稱讚) 그대로 백군(白君)은 자신(自身)보다 남을 위해 태어난 사람만 같았다. 길을 걷다가도 연로(年老)한 어른이나 술 취(醉)한 사람이라도 만나면 만사(萬事)를 제쳐놓고 자택(自宅)까지 모셔다 드리는 등, 그의 갸륵하기만 한 선행(善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지금만이 일할 때다. 지금만이 싸울 때다. 지금만이 나의 입신(立身)할 때다. 오늘 이루지 못하고 내일(來日)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토마스·켐피스의 명언(名言)을 목숨처럼 소중(所重)히 새기는 백군(白君)은, 어느 모로 보나 인간(人間) 우등생(優等生)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