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박희태(朴熙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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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성주군 금수면 명천동
효자(孝子) 박희태(朴熙泰) 48세

박희태씨(朴熙泰氏)는 비록 학교(學校) 문전(門前)에도 못 가본 무학자(無學者)이긴 했지만, 효(孝)와 인(仁)과 덕(德)의 길을 몸소 실천(實踐)한 성실(誠實)한 사람이 바로 그라고 할 수 있겠다. 

9남매(男妹) 중 넷째로 태어난 박씨(朴氏)는, 10세(歲)의 유년시절(幼年時節)부터 머슴살이를 해 오면서 모진 세파(世波)와 싸워 왔으니, 어린 가슴으로 눈물인들 오죽이나 흘렸으랴? 천진난만(天眞爛漫)하게 한창 뛰어놀 나이인 10세(歲) 때부터 25세(歲)에 이르는 15년간(年間)을 오직 머슴살이로 일관(一貫)해 온 불운(不運)의 남자(男子)로서, 한 때는 그가 벌어들인 노동(勞動)의 대가(代價)로 9명(名)의 생계(生計)를 이어가기도 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장(壯)한 일인가? 그의 형(兄)들이 직장관계(職場關係) 등 이런저런 사유(事由)로 분가(分家)해 나가자, 부득이(不得已) 그가 장남(長男) 대행(代行)을 하게 되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노부(老父)마저 기동(起動)을 못하고 병석(病席)에 눕게 되니 그의 두 어깨는 더욱 무거워져 갔다. 

천성적(天性的)으로 온순(溫順)하고 성실(誠實)한 그는, 남달리 효심(孝心)도 깊어 그 날부터 간병(看病)에 전심전력(全心全力)하였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에 걸친 오염처리(汚染處理)서부터 식사(食事)시중과 목욕(沐浴)과 옷 갈아입히기 등 그의 정성(精誠)스런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민물고기를 좋아하는 부친(父親)을 위해서 엄동설한(嚴冬雪寒)에도, 꽁꽁 얼어붙은 낙동강(洛東江)으로 달려가 물고기를 잡아다가 맛있게 끓여 드린 일도 여러 번 있었으며 특(特)히 병(病)에 좋다는 약초(藥草)를 캐기 위해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산야(山野)를 헤매는 등, 극진(極盡)한 그의 효성(孝誠)에는 밤낮이 따로 없었다. 

그의 부친(父親)은 박효자(孝孝子)의 효성(孝誠)스러운 구환(救患)의 보람도 없이 끝내 73세(歲)를 일기(一期)로 별세(別世)하였는데, 그 후(後)에도 그는 부친(父親)을 회모(懷慕)하는 마음에서 간혹 민물고기를 잡아다가 이웃 노인(老人)들에게 대접(待接)하기도 하여 주민들로부터 지극한 효자라는 칭찬을 받고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물고기를 잡아다가 동리 주민들에게 대접 한다고 하니, 세상(世上)에 이런 효자(孝子)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 사람이야말로 부모(父母)가 하늘의 별이라도 따오라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따 올 사람이다."라는 어느 노인(老人)의 말 그대로, 웃어른들을 공경(恭敬)하는 그의 독실(篤實)한 행실(行實)은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산 교재(敎材)라고 하겠다. 

머슴살이로 이룩한 4,000여평(餘坪)의 농토(農土)에서 연간(年間) 약(約) 600여만(餘萬)원의 소득(所得)을 올리고 있는 그는, 해마다 생산(生産)한 햅쌀을 형제자매(兄弟姉妹)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 우애(友愛)를 더욱 돈독(敦篤)하게 다져놓는가 하면, 그가 배우지 못한 학업(學業)을 자녀(子女)들에게만은 꼭 성취(成就)시켜야겠다는 일념(一念)으로 5명(名)의 자녀(子女) 모두가 소정(所定)의 교육(敎育)을 마치도록 열성(熱誠)으로 뒷바라지를 해 왔다. 

'열심(熱心)히 일하자!' 바로 이 여섯 자(字)가 그의 가훈(家訓)으로서, 머슴살이를 통해 익힌 그의 솔직(率直)한 일면(一面)을 가훈(家訓)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