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최용태(崔龍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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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달성군 가창면
효자(孝子) 최용태(崔龍台) 45세

천수답(天水畓) 300평(坪)과 품팔이로 벌어들이는 일당(日當) 몇 푼으로, 80 고령(高齡)의 노시모(老媤母)와 4명(名)의 자녀(子女) 등 모두 여덟 식구(食口)의 대가족(大家族)을 이끌어가고 있는 최용태씨(崔龍台氏)는, 효자중(孝子中)의 효자(孝子)라 할 만큼 인근(隣近)의 칭송(稱頌)을 한 몸에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의 효행(孝行)은 시발(始發)은 지금부터 15년전(年前)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의 부친(父親)은 15년전(年前)부터 병명(病名) 미상(未詳)의 악성피부병(惡性皮膚病)에 걸려 지금껏 병석(病席)에 누워 있는데, 그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손 틈틈이 심산유곡(深山幽谷)을 헤매면서 피부병(皮膚病)에 좋다는 약초(藥草)를 캐 온 그는, 때로는 산(山)을 헤매다가 길을 잃고 다음 날 새벽에 귀가(歸家)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실족(失足)을 하여 팔다리와 허리를 다치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하늘 아래 둘도 없는 효자(孝子) 소리를 들어 마땅할 정도였다. 

그의 모친(母親)과 자신(自身)도 신경통(神經痛) 관절염(關節炎)으로 자리에 누워야 할 몸이었지만, 자신(自身)의 신병(身病)따위는 아랑곳 않고 시간(時間)만 나면 산(山)으로 발걸음을 옮겼으니, 그의 정성(精誠)이 어떠했던가를 한 눈으로 읽을 수 있으리라. 

“그것뿐이 아니다. 때로는 입으로 고름을 빨아낼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손수 목욕(沐浴)을 시키면서 피부약(皮膚藥)을 온 몸에 발라 주는 등, 그의 놀라운 정성(精誠)은 감탄(感歎)할 정도(程度)였다.”는 인근(隣近)주민(住民)의 말 그대로, 지금껏 꼬박 15년(年) 동안을 하루같이 간병(看病)해 온 그의 극진한 효성(孝誠)은, 누가 보나 세상(世上)에 보기 드문 효자(孝子)였다. 

그리고 소아마비(小兒痲痺)로 18년간(年間) 고생(苦生)하고 있는 자식(子息)의 고뇌(苦惱)도 언제나 가슴에 담고 살아야만 했던 최씨(崔氏), 노모(老母)님 마저 관절염(關節炎)으로 눕게 되자, '부친(父親) 의 병(病)이 완쾌(完快)되지 않는 원인(原因)과 노모(老母)가 병석(病席)에 눕게 된 사유(事由)가 모두 나의 불효(不孝)탓이다.'라고 자책(自責)하면서, 그 날부터 생업(生業)을 전폐(全廢)하다시피 하여 양친(兩親)의 병(病)구완에 전력(全力)하여 최선(最先)을 다하였다. 

인근(隣近) 농토(農土)에서 품삯일을 하다가도 집으로 달려가 병문안(病問安)을 드리면서, 잠깐(暫間) 동안이나마 따뜻한 손길로 간호(看護)를 한 후(後)에야, 다시 일터로 뛰어가는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흐뭇하다 못해 눈물겨울 정도(程度)였다. 

'효자(孝子)집에 효자(孝子)난다.'는 말도 있듯이, 그의 부인(婦人)과 자녀(子女)들도 최씨(崔氏) 못지않은 효행(孝行)으로 언제나 조부모(祖父母)님들을 기쁘게 해 드려 지금에 와서는 와서는 효행(孝行)의 표본(標本)이 될 만큼 온 마을에 칭찬(稱讚)이 퍼져 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과 같이 최씨(崔氏)의 극진한 효행(孝行)의 보람으로, 노부(老父)의 악성피부병(惡性皮膚病)도 약간 증세(症勢)가 수그러졌고, 노모(老母)의 관절염(關節炎)도 조금씩 차도(差度)를 보이고 있다 하니 이 얼마나 다행(多幸)스러운 일인가. 

“이 몸을 팔아서라도 부모(父母)님의 건강(健康)을 되찾아 드릴 생각이다.” 그의 이 한 마디는 비장(悲壯)하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