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김복용(金福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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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구미시 신평동
효자(孝子) 김복용(金福龍) 33세

'자효쌍친락(子孝雙親樂)이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과 같이 자식(子息)이 부모(父母)에 효도(孝道)하면 양친(兩親)이 즐거워하고, 또한 가정(家庭)이 화목(和睦)하면 만사(萬事)가 형통(亨通)하는 법(法)이다. 

바로 이와 같은 효행(孝行)을 실천(實踐)을 통해서 보여 준 김복용씨(金福龍氏)는 3남(男) 5녀(女) 중 (中) 여섯째로 태어나 아들로서는 막내면서 부모(父母)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그 사정(事情)은 형(兄)님들이 모두 직장관계(職場關係)로 객지(客地)에서 생활(生活)하기 때문이었다. 

막내가 장남(長男) 대행역(代行役)을 해야 한다는 일도 몸시 벅찬 데다, 2년(年)전(前)부터 기동(起動)이 부자유(不自由)스러운 중풍환자(中風患者)인 부친(父親)을 간병(看病)하면서 봉양(奉養)해야 한다는 중압감(重壓感)마저 겹쳐, 그의 두 어깨는 더욱 무섭기만 했지만 그는 대학진학(大學進學)의 꿈까지 포기하면서 불평불만(不平不滿)에 가득찬 아내를 꾸준히 설득(說得)시켜 그 날부터 구환(救患)에 전심전력(全心全力)하였다.

매일(每日)같이 대소변(大小便)을 손수 받아냈는가 하면, 변비증(便秘症)으로 고생하실 때는, 관장약(灌腸藥)을 항문(肛門)에 주입(注入)시켜 부친(父親)의 고통(苦痛)을 덜어 드리기도 했다. 

그의 이와 같은 효성(孝誠)은 74세(歲)의 노모(老母)에게도 베풀어 졌으며 특히 그는 관내(管內) 1,2,6통(統) 노인회(老人會)를 수시로 방문(訪問)하여 경로사상(敬老思想) 발로(發露)의 본보기를 보여주기도 했는데, 지금껏 9회(回)에 걸쳐 16만(萬)원 상당(相當)의 사비(私費)를 들여 경로(敬老)잔치를 개최(開催)하는 등, 남달리 노인(老人)을 공경(恭敬)하는 마음이 두텁기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부모(父母)님 생신(生辰)에는 70세(歲) 이상(以上)의 마을 노인(老人) 40여명(餘名)을 자택(自宅)으로 초청(招請)하여 푸짐한 음식(飮食)을 대접(待接)하기도 했다. 

지난 1985년(年) 12월(月)에도 노인회(老人會)를 방문(訪問)하여 월동용(越冬用) 연탄(煉炭) 300장을 기증(寄贈)하는 등 그의 효행(孝行)은 끝이 없었다. 

“자기(自己) 부모(父母)모시듯 노인(老人)들을 공경(恭敬)하는 그의 고운 마음씨에 고개가 수그러질 뿐이다. 핵가족(核家族)시대(時代)에 보기 드문 기특(奇特)한 청년(靑年)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 아들보다 낫다."라는 마을의 어느 노인(老人)의 말 그대로 김씨(金氏)는 동네에서 소문(所聞)난 효자(孝子)였다. 

그의 행적(行績)이 널리 알려지면서 각계(各界) 각층(各層)으로부터 많은 표창(表彰)을 받기도 했는데, 그 내용(內容)을 적어보면 1982년(年) 8월(月) 구미시(龜尾市) 정화추진협의회장(淨化推進協議會長)의 감사장(感謝狀)을 비롯하여, 1983년 11월 경상북도 지사가 수여하는 표창장을, 1982년 10월 구미경찰서장의 감사장, 1984년(年) 5월(月) 구미시장(龜尾市長)의 효행표창장(孝行表彰狀), 그리고 1984년 10 월(月) 구미경찰서장(龜尾警察暑葬)의 감사장(感謝狀), 1984년(年) 10월(月) 한국반공연맹이사장(韓國反共聯盟理事長)이 수여(授與)하는 표창장(表彰狀), 1984년(年) 12월(月) 재향군인회(在鄕軍人會) 구미시연합분회장(龜尾市聯合分會長)의 표창장(表彰狀), 1984년(年) 11월(月)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찰국장(警察局長)의 감사장(感謝狀), 1986년(年) 2월(月) 구미(龜尾)로타리클럽회장(會長)이 수여(授與)하는 효자상(孝子賞) 등 수많은 표창장(表彰狀)과 감사장(感謝狀)을 받기도 했다. 

사회봉사(社會奉仕)를 위해서 한 몸을 아낌없이 바치고 싶다는 김복용씨(金福龍氏), 그는 오늘도 푸짐한 선물(膳物)을 한 아름 안고 경로당(敬老堂)을 향(向)해 급(急)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