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김준환(金俊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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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대구직할시 북구 복현동
효자(孝子) 김준환(金俊煥) 45세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는 인(仁)의 근본(根本)이라고 말한 공자(孔子)의 효제위인지본(孝悌爲人之本)을 평소 실천(實踐)을 통(通)해서 모범(模範)을 보여 주고 있는 초등학교(國民學校) 교사(敎師)가 있다.

그 주인공(主人公)은 곧 김준환씨(金俊煥氏)로서 특(特)히 그는 25년(年) 동안 몸담아 온 학교(學校)에서 “뿌리 찾기 교육(敎育)”을 어린이들에게 생활화(生活化)시키고 있으며, 또한 종가(宗家)를 수시(隨時)로 찾아가서 자녀(子女)들에게 조상(祖上)의 얼과 뿌리를 의미(意味)를 일깨워 주는 한편,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가훈(家訓)을 정(定)해 놓고 가정(家庭)의 평화(平和)를 위해서도 최선(最善)을 다해 왔다. 

김교사(金敎師)는 학교(學校)에서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곧잘 했다. 

“충효(忠孝)의 사상(思想)은 충(忠)에 있어서 나보다 내가 속하는 사회(社會), 나아가 국가(國家)를 먼저 생각하고 염려(念慮)하는 정신(精神)을 말하며, 효(孝)는 나 자신(自身)의 안위(安危)를 생각하기에 앞서 부모(父母)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충효(忠孝)는 인간(人間)이 인간(人間)답게 살아나가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실천(實踐)해야 하는 근본(根本)이다."라고.   

그가 지닌 철학(哲學) 그대로, 김씨(金氏)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철저(徹底)한 실천자(實踐者)였다. 

좋은 예(例)의 하나로는 모친(母親)의 병환(病患)때였다. 

그의 모친(母親)은 담석증(膽石症)을 수술(手術)한 이후 중풍(中風)으로 눕게 되었는데, 얼마나 지극(至極)하게 간병(看病)을 했던지 인근(隣近住民)들의 찬사(讚辭)가 끊이지 않을 정도(程度)였다. 

그것도 장남(長男)도 아닌 삼남(三男)의 위치(位置)에서 눈물겹게 뒷바라지를 했으니 칭찬(稱讚)이 뒤따를 수 밖에 더 있겠는가. 매일(每日)같이 대소변(大小便) 처리(處理)는 물론(勿論)심지어 손톱과 발톱까지도 그가 손수 깎아 드리는 등, 그의 자상(仔詳)한 효성(孝誠)은 동민(洞民)들로부터 칭송(稱頌)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다. 

“김선생((金先生)님은 정말 효자(孝子)입니다. 학교(學校)에서 돌아오는 즉시(卽時) 환자(患者)의 방(房)을 찾아가서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역겨운 용변처리(用便處理)도 언제나 웃는 얼굴로 해 냈습니다. 때때로 어머니를 등에 업고 마당을 한 바퀴 돌면서 바람을 쐬게 하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하느님도 상(賞)을 내릴 정도(程度)였습니다." 어느 동민(洞民)의 탄사(歎辭) 그대로 그의 효행(孝行)은 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형(兄)님이 척추(脊椎)디스크로 인(因)하여 부산(釜山)에서 입원(入院)했다는 소식(消息)에, 그 자신(自身)은 물론 각처(各處)에 흩어져 있는 형제(兄弟)들이 각기(各其) 100만(萬)원씩 모아서 400만(萬)원을 입원비(入院費)에 보태도록 하는 등, 남다른 우애(友愛)로 주변(周邊) 사람들을 다시 한번 감동(感動)시켰다. 

이 밖에도, 그는 생계(生計)가 어려운 김대연(金大然) 어린이의 가정(家庭)을 직접(直接) 찾아가, 15만(萬)원을 보태 주면서 포장마차가게라도 해 보도록 도와 주기도 했다.

1981년 1월(月) 문교부장관(文敎部長官)의 표창장(表彰狀)을 받기도 한 그는, 오늘도 학교(學校)에서 귀가((歸家)하기가 바쁘게 문안(問安)인사를 드리기 위해 모친(母親)의 방(房)으로 급(急)히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