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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무희 여사가 살고 있는 안동군 서후면 교동 349번지, 속칭 ‘솔밤’이라는 가난한 두메마을에 10여대의 세거자택(世居自宅)이 있다. 여기서 반경 2km이내 지역에는 충신 하위지 선생의 종가를 비롯하여 동호 권영청 선생, 송암 권호문 선생, 학봉 김성일 선생, 경당 장흥효 선생등 명현석학들의 종가가 있고 그 후손들이 많이 살며 홍유달사(鴻儒達士)가 많이 배출되어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이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박여사는, 조선 숙종(肅宗)때 예학에 뛰어난 산택재 권태시 선생의 후예로서 유학자 제강 권도혁씨의 차녀이다. 비교적 부유한 전통 유교가정에서 조부모의 훌륭한 훈도를 받으면서 성장하여 부덕을 쌓고, 19세때 사육신인 충렬공 단계 하위지 선생 지파(支派) 5대 봉사손 하형락씨와 결혼하였다.
시댁은 대대연면(代代連綿) 문한세가로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 초기인 1400년대의 세종조부터 성종조 전후에 걸쳐 유례 드문 고문 책을 집중 보존하고 있는 영남 굴지의 명가이다.
이는 조선 전기 사회경제사 연구 등의 귀중한 사료로 높이 평가되며, 영남대학교 교수 이수건박사가 최근 ‘경북지방 고문서집성’이란 문헌을 통하여 그 일부를 학계에 발표한 바 있다. 여기 소개된 하종우씨가 권여사의 시부이다.
출가 3년 만에 6.25사변이 일어나 단란하였던 가정에 뜻밖의 비극이 일어났으니, 그 해 7월 초순경 피란 길에 나섰던 남편은 가두모병으로 군에 입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치열한 격전지로 이름 높던 경주·안강전투에서 부군이 전사했다는 풍문만으로 오늘에 이르니, 분명 군번 없는 무명용사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산화했을 것이다. 군번 없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보훈혜택마저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권여사의 역경의 길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결혼당시의 가족은 시조부모, 시부모 남편과 본인 등 6명이었다. 변란 나간 손자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70 노령의 시조부모는 전쟁의 와중에서 장손의 전사소식에 식음을 전폐하다가 국군이 수복 2개월 후인 그 해 늦가을, 홧병으로 손부인 권여사의 극진한 위로와 정성스런 병간호의 보람도 없이 시조부모가 잇달아 별세하였다.
이로부터 권여사의 효행을 주위에서 알게 되었다. 권 여사는 그 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 보면서, 시부모의 마음을 항상 평안하게 또 즐겁게 하여 드리는 것을 생활신조로 살아왔던 것이다. 가사의 용돈마저 시아버님께 맡겨 두었다가 일일이 타 쓰고 평소 출필고(出必告) 반필면(反必面)에 철저하였다.
시부 효강 하종우옹은 조상전래의 유풍을 고수하며 한학에 조예가 깊고 예절바르신 인품으로 안동 선비의 전형이라 칭송되는 분인데, 청렴, 강직, 엄격하신 성품 때문에 안동지방에서는 호랑이영감님으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이러한 시아버지를 모시는 권 여사는 시부의 뜻을 좇아 모든 일을 선현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기에, 준엄하기로 유명한 시부 효강장(曉岡丈도) 항상 자부의 효행자랑을 하셨으니, 이로써 권여사의 뛰어난 효성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게 하는 사실이라 하겠다.
시부께서 병석에 계실 때 3년간 대소변 처리와 의복, 목욕 등의 청결은 물론, 천심으로 구환을 하였으나 83세로 작년 봄 타계하셨다. 시모마저 4년간 병석에 계셨는데, 권 여사 자신도 중년에 척수염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여 불편한 몸임에도 기동을 못하시는 시모의 시탕, 식사, 대소변 처리 등 밤낮 없는 뒷바라지를 성심으로 하였으나, 87세의 고령으로 금년 2월 중순에 별세하셨다. 그 후 오늘까지 시부모 빈소에 삭망전(朔望奠)은 물론이고, 조석상식(朝夕上食)을 고례에 따라 빠짐없이 올리고 있다.
슬하에 혈육이 없어 시동생 하시격씨의 맏아들인 첫돌 지난 하건식을 입양하여 어렵게 대학을 졸업시켜 지금 한국 유수의 종묘업체인 중앙종묘(주)의 중견사원으로 회사에 진출시켰다. 직장 따라 객지에 별거 생활하는 아들 내외는 누대(累代) 주손(冑孫)으로 잦은 봉제사에 극진하고, 병석의 양조부모와 양모에 대한 효성이 뛰어났으니, 이러한 바가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겠는가?
권 여사는 뜻밖에 공교로운 기회를 만나, 적적한 시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고자 생후 3일의 강보(襁褓)영아를 얻어 양육하고 있다. 지금 14세의 안동여중 2학년인 하춘자양은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양조부모에 대한 효심이 특출하였다. 양모가 잠시 자리라도 비울 때면, 조부모의 대소변 처리를 하는 등 병약한 어머니를 도우니, 인근에서 보는 이마다 효녀 심청의 화신이라 하여 아낌없는 칭찬을 보내고 있으니, 이는 권여사의 솔선수범하는 출천지효행(出天之孝行)의 덕화(德化)라 하겠다.
청빈한 선비집 주부로서 남편이 해야 할 모든 일을 대신하여, 많은 봉제사, 접빈객을 지성으로 받들었으며. 명문의 가성(家聲)을 계승코자 40년을 하루같이 시어른들을 모시면서 한 번도 시부모의 뜻을 거역한 바 없었고, 자녀교육에 전심하는 등 자신을 희생하는 가시밭길을 스스로 택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고도산업사회의 특징인 부부중심의 핵가족풍조가 팽배하여 경노효친사상이 흐려져 가는 이 때, 권여사의 높은 부도와 독실한 효성의 숨은 행적은 만고의 귀감이며, 현대 뭇 여성들의 사표(師表)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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