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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숙(崔正淑) 여사(女史)는 빈한(貧寒)한 가정(家庭)의 둘째 딸로 태어나 가정생활(家庭生活)이 곤궁(困窮)하여 초등학교(國民學校)를 겨우 졸업(卒業)하고는 가사(家事)를 도우면서 자애(慈愛)하신 부모(父母)님의 교육(敎育)을 받아, 여자(女子)의 삼종지도(三從之道)와 부덕(婦德)을 익혀 예절(禮節)바르고 보기 드문 규수(閨秀)로 자라 김일수씨와 결혼(結婚)하였다.
당시(當時)의 시가(媤家)는, 3급(級) 상이용사(傷痍勇士)로 건강(健康)이 정상(正常)이 못 되는 시부(媤父)님과 사지(四肢)가 부자유(不自由)스러운 중환자(重患者)인 시모(媤母)님 그리고 시(媤)동생이 있었는데 가산(家産)이라고는 농토(農土)가 3반(反) 미만(未滿)인 영세농가(零細農家)였다.
최여사(崔女史)는 이러한 불우(不遇)한 가정(家庭)에서 신혼초(新婚初)부터 셋째자부(子婦)이면서도 시모(媤母)님의 병환(病患)을 간호(看護)하며 시(媤)동생의 뒷바라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自己)에게 부하(負荷)된 하늘이 준 운명(運命)이나 사명(使命)으로 여기고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중환(重患)인 시모(媤母)님의 간호(看護)와 시(媤)동생 및 자녀(子女)들의 교육(敎育)과 남편(男便)의 내조(內助)를 오히려 낙(樂)으로 생각하고 열심(熱心)히 일하였다.
가정(家庭)이 워낙 빈곤(貧困)하니 남편(男便)을 도와 일을 함은 물론(勿論)이고 자기(自己)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았다.
품팔이를 위시(爲始)하여 가세(家勢)에 도움이 되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기꺼이 일을 하였다.
와병(臥病)으로 신음(呻吟)하시는 시모(媤母)님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며 의복(衣服)을 깨끗이 갈아 입히고 이부자리를 항상(恒常) 깨끗이 세탁(洗濯)해 드리고 환자방(患者房)의 청소(淸掃)와 환자(患者)의 목욕(沐浴)을 시켜 드리는 등, 최여사(崔女史)의 일과(日課)는 그야말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아무리 바빠도 때가 되면 꼭 옆에 붙어 앉아서 밥을 떠 먹이고, 또 병상(病床)에 계시는 시모(媤母)님의 지리함과 무료(無聊)함을 덜어 드리기 위해서는 수시(隨時)로 간식(間食)을 장만하여 이웃 어른들을 초대(招待)하여 시모(媤母)님의 말벗이 되게 하는 정성(精誠)도 쏟았다. 이는 말로써는 이루 다 표현(表現)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며느리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에 시모(媤母)님은 감격(感激)하여 친(親)딸같이 사랑으로 대(對)하니 지목지애(舐犢之愛)에 비(比)할 만하다 하겠다. 이처럼 고부간(姑婦間)의 정(情)이 날이 갈수록 두터워지고 가정(家庭)이 화목(和睦)해지니 비록 병환(病患)이 있는 집안이긴 하지만 화기(和氣)가 애애(靄靄)하여, 동민(洞民)이 모두 칭찬(稱讚)하며 세인(世人)이 부러워할 정도(程度)가 되었다.
이와 같은 효행(孝行)은 인위(人爲)의 것으로는 볼 수 없으며 하늘이 내린 그야말로 출천지효부(出天之孝婦)라 하여, 보는 이마다 감탄(感歎)해 마지않으며 금세(今世)에 보기 드문 여성(女性)이란 칭찬(稱讚)의 소리가 온 동리(洞里)에 메아리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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