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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天性)이 부드럽고 착하며, 어릴 때부터 근면성실(勤勉誠實)하고 부모(父母)에 대한 효심(孝心)이 뛰어난 이영자(李英子) 여사(女史)는 1956년(年) 21세(歲)때 박성환씨와 결혼(結婚)하였다. 당시(當時)의 시가(媤家)는 끼니조차 이어가기 힘드는 가세(家勢)였으나, 이여사(李女史)는 이 날까지 효행(孝行)을 다하고 있다.
홀시조모(媤祖母)님과 홀시모(媤母)님을 모시고 시(媤)동생 형제(兄弟), 시(媤)누이 자매(姉妹)와도 화목(和睦)하게 지내며, 슬하(膝下)에 3남(男) 2녀(女)를 둔 이여사(李女史)는 대가족(大家族)이며 어려운 살림살이를 열(熱)과 성(誠)을 다해 일하여, 살림도 늘려가면서 단락(團樂)하게 살아가는 알뜰 주부(主婦)이기도 하다.
효심(孝心)이 남달라서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시조모(媤祖母)님과 시모(媤母)님을 항상(恒常) 즐겁게 해 드리는 데 온갖 성력(誠力)을 다 쏟았다.
시(媤)어른들은 이런 효성(孝誠)스러운 며느리에 흡족(洽足)해 하면서 ‘둘도 없는 우리 손부(孫婦), 우리며느리’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며 마지않는다.
특(特)히 85세(歲) 되시는 시조모(媤祖母)님이 5년전(年前)부터 노환(老患)으로 몸져 누워 기동(起動)하지 못하게 되매, 이여사(李女史)는 이를 몹시 안타까워하며 온갖 정성(精誠)으로 시봉(侍奉)과 시탕(侍湯)을 하고 있다. 매일(每日)같이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면서도 얼굴 한 번 찡그리는 일 없이 한결같이 뒷바라지를 하고 있으며 원(願)하시는 음식(飮食)은 무엇이든지 장만하여 드리고 있다. 또 의복(衣服)은 깨끗하게 갈아입히고, 아침의 세수(洗手)와 저녁의 목욕(沐浴) 등도 때맞추어 해 드리고, 정화수(井華水)를 떠 놓고 시조모(媤祖母)님의 쾌차(快差)와 시모(媤母)님의 만수무강(萬壽無疆), 그리고 가정(家庭)의 화목(和睦)과 평안(平安)을 빌기도 했다.
또한 시모(媤母)님의 기력(氣力)이 더 쇠(衰)하기 전(前)에 호강을 시켜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1년(年)에도 몇 차례의 관광여행(觀光旅行)을 시켜 드리기도 하면서, 4대(代)가 함께 사는 집안의 맏며느리답게 가정(家庭)의 화목(和睦)에 성력(誠力)을 쏟으며, 언제나 웃음이 끊이지 않는 단락(團樂)한 분위기(雰圍氣)를 이루어, 이웃으로부터 부러움의 대상가정(對象家庭)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가정(家庭)살이였으나 열심(熱心)히 일하고 알뜰히 저축(貯蓄)하여 현재(現在)는 아담(雅淡)한 양옥주택(洋屋住宅)에다 과수원(果樹園)을 가꾸며 남부럽지 않게 생활(生活)할 수 있을 정도의 가계(家計)로 향상(向上)시켜 놓았다.
언제나 바쁜 가정(家庭)살이였음에도 틈을 내어서, 동리(洞里)의 일에도 적극적(積極的)인 열의(熱意)로 참여(參與)하여 앞장서서 협조(協助)하고 있다. 한 때는 화천리(花川里) 새마을 부녀회장직(婦女會長職)도 맡아서 소득증대(所得增大)·환경개선(環境改善)·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협동생활(協同生活), 노인복지(老人福祉) 행사(行事)에도 많은 공헌(貢獻)을 하고 있다.
가정(家庭)을 평화(平和)롭게 다스리는 주부(主婦)이고, 시(媤)어른들에게는 지극(至極)한 효부(孝婦)이고, 자녀(子女)에게는 훌륭한 어머니이고, 남편(男便)을 하늘같이 여기고 공손(恭遜)하게 받드는 이여사(李女史)야말로, 효부(孝婦)·현모양처(賢母良妻)로 우리 한국전통(韓國傳統)의 여성상(女性像)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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