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최점시(崔点始)

페이지 정보

본문

제30회(1987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금릉군 대덕면 내감리
효부(孝婦) 최점시(崔点始) 60세

최점시(崔点始) 여사(女史)는 1947년(年) 19세(歲)때 동갑(同甲)인 박현석씨와 결혼(結婚)하여 아들 하나를 두고 별고(別故)없이 행복(幸福)하게 살았다. 

6.25 동란(動亂)이 일어나자 남편(男便)은 용약(踊躍) 군문(軍門)에 입대(入隊)하게 되었는데, 1952년(年) 9월(月)에 원통하게도 전사(戰死)하였다. 

따라서 결혼(結婚)한지 5년(年), 즉 24세(歲)의 꽃다운 나이에 청상(靑孀)이 되었다. 하늘이 내려앉는 것처럼 눈앞이 캄캄하였으나 시조부(媤祖父)님과 시부모(媤父母)님의 층층시하(層層侍下)인지라 자신(自身)의 슬픔은 내색(內色)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빈 방(房)에 들어와서는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한(限)없이 눈물을 흘린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한다. 

그런 처지(處地)에 놓여 있는데 시조부(媤祖父)께서는 연만(年晩)하셔서 노망기(老妄氣)마저 겹쳐 대소변(大小便)을 가리지 못하는데다 대변(大便)을 벽(壁)에다 바르고 의복이나 침구(寢具)에도 마구 칠해 놓았다. 

최여사(崔女史)는 이 난감(難堪)한 뒤처리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조금도 꺼리지 않고 깨끗이 않고 깨끗이 치우고 세탁(洗濯)도 해 나갔다. 한편 시모(媤母)님께서는 아들의 죽음에 충격(衝擊)을 받아 정신이상(精神異常)을 일으켜 수시(隨時)로 출가(出家)를 해 버리니 시모(媤母)님을 찾아 헤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다. 

그러는 동안에 시조부(媤祖父)님께서는 구환(救患)의 보람도 없이 별세(別世)하시고 건강(健康)하게 농사(農事)일을 보살피던 시부(媤父)님께서도 1965년(年) 62세(歲)로 세상(世上)을 떠나시고, 이어서 시모(媤母)님도 별세(別世)하시고 말았다. 

남편(男便)없이 시(媤)어른들을 의지(依支)하며 한결같이 정성(精誠)RJt 모셨으나 차례로 별세(別世)하시니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고 하지만 이는 박복(薄福)한 자기(自己)의 효성(孝誠)이 부족(不足)했던 탓으로 돌리고 회한(悔恨)의 눈물만 흘렸다. 

집안 살림은 쪼들릴 대로 쪼들렸으나, 시(媤)동생 4명(名)을 모두 고등학교(高等學校)까지 교육(敎育)시키고 성취(成娶)케 했으니, 그 고생(苦生)이야 가(可)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지금은 성장(成長)한 아들이 결혼(結婚)하여 손자(孫子) 2명(名)까지 뒀으니 옛일을 회상(回想)하며 허무(虛無)한 인생(人生)을 돌이켜보고 음미(吟味)할 마음의 여유(餘裕)도 생겼다 한다. 

한편 위장병(胃腸病)으로 허약(虛弱)하여 노동력(勞動力)이 없는 시(媤)동생과 폐(肺)가 나빠진 동서(同婿)도 농사(農事)일을 고사하고 집안 일도 제대로 못하는 실정(實情)인지라, 따라서 최여사(崔女史)가 집안 일과 농사(農事)일을 도맡아 하면서 조카 4명(名)을 공부시키고 있다. 

금년(今年)이 회갑(回甲)인데 수원(水原)에서 고등학교(高等學校) 교사생활(敎師生活)을 하고 있는 아들이 그 곳 수원(水原)에서 함께 편안(便安)하게 살자고 하지만 최여사(崔女史)는 조카들 공부를 시켜야 한다면서 이곳에 머물면서 농사(農事)일에 열중(熱中)하고 있다. 

이와 같이 13년(年) 동안을 가위(可謂) 남편(南便)없이 층층시하(層層侍下)에서 시(媤)어른들을 정성(精誠)껏 모시면서, 효행(孝行)을 다하고 성의(誠意)껏 시(媤)동생들을 뒷바라지해 온 최여사(崔女史)야말로 효부(孝婦)요, 열녀(烈女)의 표상(表象)으로서 만인(萬人)의 본보기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