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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歲)때 농촌(農村)에 출가(出嫁)하여 남달리 부지런히 일하며, 시부모(媤父母)님을 잘 봉양(奉養)하며 단락(團落)한 생활(生活)을 해 온 박순란(朴順蘭) 여사(女史)는 하늘같이 믿어 온 부군(夫君)이 1973년(年)에 사망(死亡)하게 되니, 슬하(膝下)의 3남매(男妹)와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고 한편으로 앞으로 살아갈 길이 암담(暗澹)하기만 하였다.
곧이어 시부(媤父)님마저 병환(病患)으로 몸져 눕게 되자, 백방(百方)으로 약(藥)을 구(求)하는 일과 병간호(病看護) 등 시부(媤父)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지성(至誠)으로 보살폈으나 차도(差度)는 없고 점점 쇠약(衰弱)해지시니, 산(山)과 들을 헤매면서 좋다는 약초(藥草)를 구(求)하기에 동분서주(東奔西走)하여 시탕(侍湯)에도 정성(精誠)을 다하였다. 그러기를 3년(年), 박여사의 극진한 구환의 보람도 없이 1980년에 끝내 69세로 별세하였다. 박여사(朴女史)는 한없이 애통(哀痛)하며 예(禮)를 좇아 장례(葬禮)를 치렀다.
이제는 홀로 남은 73세(歲)의 시모(媤母)님과 3남매(男妹)의 생활(生活)이 자신(自身)의 어깨에 매어 있다는 중책(重責)을 절감(切感)하여 굳은 의지(意志)로 살 것을 다짐하고 분연(奮然)히 일어섰다.
박여사(朴女史)는 시모(媤母)님의 봉양(奉養)과 3남매(男妹)의 학비(學費)마련 등의 당면(當面)한 생계(生計)를 위하여 구미(龜尾) 모직물공장(某織物工場)에 취업(就業)해서 일하며 퇴근(退勤)후(後)에는 시모(媤母)님의 시중과 자녀(子女)의 뒷바라지에 바쁜 일과(日課)를 보내고 있다.
박여사(朴女史)는 홀시모(媤母)님께서 노경(老境)에 외롭고 쓸쓸하지 않도록 자신(自身)의 몸이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효성(孝誠)을 다하여 봉양(奉養)하였다. 시모(媤母)님 또한 그러한 자부(子婦)의 정성(精誠)에 흡족(洽足)하여 위로(慰勞)하면서 격려(激勵)하니, 흡사(恰似) 친모녀간(親母女間) 같은 고부(姑婦)가 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73세(歲)의 노시모(老媤母)님께서 쓸쓸해 하실까 염려(念慮)하여, 자주 이웃 노인(老人)을 초청(招請)하여 말벗이 될 수 있도록 주선(周旋)함은 물론 음식물(飮食物)을 대접(待接)하고 공경심(恭敬心)을 다하니 찾아온 노인(老人)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착하고 효심(孝心)있는 박여사(朴女史)를 칭찬(稱讚)해 마지 않는다.
어려우면서도 자녀교육(子女敎育)에도 힘을 쏟으니 장녀(長女)는 현재(現在) 중학(中學) 3학년(學年)에, 장남(長男)은 중학(中學) 1년(年)에, 차남(次男)은 초등학교(國民學校) 6학년(學年)에 재학(在學)중(中)인데, 이들 자녀(子女)들마저 박여사(朴女史)에게 순종(順從)하고 착실(着實)하니, 박여사(朴女史)의 시부모(媤父母)님에 대한 지극(至極)한 효심(孝心)이 자녀(子女)들을 감화(感化)시킨 결과(結果)라 하겠다.
남편(男便)을 여의고 생계(生計)를 한 몸으로 꾸려가면서 시부모(媤父母)님에게 지성(至誠)으로 효도(孝道)하고 성실(誠實)하게 살아가는 박여사(朴女史)야말로 진실(眞實)한 한국(韓國)의 전통적(傳統的) 여인(女人)상(像)이며 모든 여성(女性)들의 모범(模範)이라 격찬(激讚)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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