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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길(李大吉) 여사(女史)는 1965년(年) 20세(歲)의 나이로 신기덕씨와 결혼(結婚)하였다.
출가(出嫁)후(後) 20여년(餘年) 동안을 간난(艱難)한 생활(生活)이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시부모(媤父母)와 시조모(媤祖母)님을 모심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불평(不平)이나 원망(怨望)함이 없이 극진(極盡)하게 공경(恭敬)하는 마음으로 성심(誠心)을 다하여 봉양(奉養)하고 있으니, 마을 주민(住民)들로부터 칭찬(稱讚)이 자자(藉藉)하다.
98세(歲)인 노시조모(老媤祖母)님과 맹인(盲人)인 시모(媤母)님과 시부(媤父)님, 그리고 자신(自身)의 자녀(子女) 3명(名)의 4대(代)가 함께 사는 가정(家庭)의 어려운 살람살이를 이여사(李女史)가 도맡아 이끌며 살아오고 있다.
이와 같은 온 식구(食口)의 부양(扶養)과 시중을 성의(誠意)껏 해 오는 이여사(李女史)의 심신(心身)은 지칠 대로 지쳤으나, 힘껏 살림을 해 가면서 어른들에게 효성(孝誠)을 다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식사(食事)도 한 자리에서 하지 않고 따로따로 하기 때문에, 시조모(시(媤祖母)님과 시부모(媤父母)님이 따로였고, 또한 아이들이 따로 식사(食事)를 하게 되니, 한 끼에 네 차례나 밥상을 차려야 하는 번거러움에다, 더욱이 맹인(盲人)인 시모(媤母)님은 일일이 떠 먹여야 드려야만 하는 처지(處地)였으므로, 한 끼의 식사(食事) 수발도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그 위에 이제는 노환(老患)으로 대소변(大小便)을 가리지도 못하는 노시조모(老媤祖母)님의 간호(看護)가 더욱 힘들게 되었다.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야 하고 그로 인(因)하여 어렵혀진 의복의 세탁(洗濯)도 자주해야 했고, 침구(寢具) 또한 마찬가지 일이었다.
그리고, 방(房)안의 청소(淸掃) 등도 힘드는 일이었으나 얼굴 찌푸리는 일 없이 고달픔도 모르고 해내면서, 다만 괴로워하는 시조(媤祖母)님의 고통(苦痛)을 어떻게 덜어 드릴까 하는 것만이 이여사(李女史)의 걱정이었다.
이와 같은 고되고 어려운 살림살이를 알뜰하게 꾸려나가면서 끈질긴 근검절약(勤儉節約)으로 저축(貯蓄)하여, 마을 앞에 800여평(餘坪)의 농토(農土)를 장만하고 세 자녀(子女)를 중학교(中學校)와 고등학교(高等學校), 전문대학(專門大學)에 각각(各各) 진학(進學)까지 시켰으니 그 교육열(敎育熱) 또한 대단하지 않은가.
웃어른들에게는 경부여천 경모여지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며느리로서의 본분(本分)을 다하고, 아이들에게 인자(仁慈)한 어머니로서의 할 바를 다하고 있는 이여사(李女史)의 꿋꿋하고 성실(誠實)한 품행(品行)과 지극(至極)한 효행(孝行)이야말로 현대사회(現代社會)에서는 그 유례(類例)를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며 모든 사람들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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