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남봉희(南鳳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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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1987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안동군 충천면
효부(孝婦) 남봉희(南鳳熙) 38세

평소 엄격(嚴格)한 가정교육(家庭敎育)을 받아 부모(父母)를 공경(恭敬)하고 효행(孝行)이 백행지본(百行之本)이라는 생각에 철저(徹底)하였던 남봉희(南鳳熙) 여사(女史)는, 1971년(年) 22세(歲)때 권대여씨(氏)와 결혼(結婚)하였다. 

시가(媤家)에서는 양시조모(養媤祖母)와 시부모(媤父母)의 층층시하(層層侍下)에 시(媤)동생까지 있었다. 

평소(平素) 몸에 배어 있는 남녀사(南女史)의 효심(孝心)은 시(媤)어른들을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하고 이웃에 살고 있는 시백모(媤伯母)님과 시숙모(媤媤叔)님마저 친부모(親父母)처럼 잘 받들었으므로, 온 동민(洞民)의 칭찬(稱讚)을 한 몸에 받으면서 살아왔다. 

결혼(結婚)한 지 3년(年)째 되던 해에 시부(媤父)님께서 해수천식(咳嗽喘息)으로 병석(病席)에 누워 바깥 출입(出入)마저 못할 정도로 병고(病苦)에 시달리게 되자 백방(百方)으로 약(藥)을 구(求)하여 정성(精誠)으로 간호(看護)한 보람으로 완쾌(完快)되었는데, 이어서 이번에는 시모(媤母)님이 만성관절염(慢性關節炎)으로 와병(臥病)하시자, 두 살난 어린 자식(子息)을 업고 병원(病院)으로 약방(藥房)으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면서 3년여(年餘)에 걸친 성의(誠意)에 찬 구환(救患) 끝에 겨우 마을 출입(出入)이 가능(可能)해졌다. 

그런데 이 무슨 청천벽력(靑天霹靂)인지 1979년(年)에는 양시조모(養媤祖母)님이 방(房)안에서 평지낙상(平地落傷)으로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안동(安東)의 병원(病院)에 입원(入院)하고 진료(診療)하여 보았으나 별차도(別差度)가 없었고 고령(高齡)의 노인(老人)이기 때문에 수술치료(手術治療)도 불가능(不可能)하다기에 하는 수 없이 퇴원(退院)하였다. 

기동(起動)을 할 수 없는 시조모(媤祖母)님의 손발이 되어야 했고, 식사(食事)로부터 대소변(大小便) 받아내기에 이르기까지 남여사(南女史)의 손을 거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불만(不滿)이나 불평(不平)은 아예 모르고 오로지 병간호(病看護)에만 전력(全力)하면서 정성(精誠)으로 쾌유(快瘉)를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마음으로 기도(祈禱)할 따름이었다. 8년(年)이란 세월(歲月)을 하루같이 변(變)함없는 효성(孝誠)을 다하여 병(病)구완을 하였다. 

방 안에서만 있는 시조모(媤祖母)님의 적적(寂寂)함을 달래 드리기 위해서 이웃 노인(老人)들과 시백모(媤白母)님을 주야(晝夜)로 모셔다 음식(飮食)이나 이야기책 등으로 한결같이 극진(極盡)한 대접(待接)에 노력(努力)하였으므로, 남여사(南女史)댁(宅)은 마치 경로당(敬老堂)처럼 노인(老人)들이 모이고 이것이 시조모(媤祖母)님께서는 큰 위안(慰安)이 되었다 하니 남녀사(南女史)는 효행실천(孝行實踐)을 위하여 태어난 사람처럼 보는 이들은 감탄(感歎)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남녀사(南女史)는 이같이 연거푸 병고(病苦)에 시달리는게 세 시(媤)어른의 간병(看病)에 기나 긴 세월(歲月) 동안 몰두(沒頭)하다 보니 자신(自身)은 제때에 식사(食事)도 못하고 밤잠을 설치기가 일쑤였으니 자신(自身)도 그만 위장병(胃腸病)을 앓아 투병생활(鬪病生活)을 해야만 하였다. 환자(患者)이면서 잠시(暫時)도 간병(看病)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친가(親家)에서 10리(里)안의 가까운 거리(距離)에서 살면서도 친정부모(親定父母)님 한 번 못 찾아뵙는 불효(不孝)를 마음 아파하고 있다. 

양시조모(養媤祖母), 시부모(媤父母)님의 병(病)구완에 심신(心身)의 틈이 없는 남여사(南女史)는 남편(男便)을 내조(內助)하며 10명(名) 대가족(大家族)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힘겨움에도 노시조모(老媤祖母)님의 간병(看病)과 뒷바라지에 조금도 소홀(疎忽)함이 없음에는 극구(極口) 찬사(讚辭)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