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권갑선(權甲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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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1987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군위군 의흥면
효부(孝婦) 권갑선(權甲仙) 54세

가난한 가정(家庭)에서 태어나 부모(父母) 슬하(膝下)에서 자라면서, 엄격(嚴格)한 부친(父親)의 알뜰한 교훈(敎訓)으로 부도(婦道)의 행실(行實)이 몸에 밴 권갑선(權甲仙) 여사(女史)는 22세(歲)에 부모(父母)가 정(定)해 준 대로 박정대씨와 결혼(結婚)하였다. 

천성(天性)이 어질고 착한 마음을 타고난 권여사(權女史)였지만, 시가(媤家)의 살림살이가 너무나 어려웠기에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생활(生活)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도 불편(不便)한 인상(印象)을 주지 않고 지성(至誠)으로 시어른을 모셨다. 그러면서 낮이면 들녘에 나가 두 손이 부르트도록 남편(男便)을 도와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밤을 새워가며 일하여 집안 살림을 일으키기에 진력(盡力)하였다. 

권여사(權女史)가 출가(出嫁)했을 당시(當時) 시부모(媤父母)님은 이미 이순(耳順) 노인(老人)이었는데,  평소(平素)에 닦은 부도(婦道)에다 천품(天稟)이 효성(孝誠)스러웠으므로, 노시부모(老媤父母)님을 평안(平安)하게 모셔야겠다는 일념(一念)이 잠시(暫時)도 염두(念頭)에서 떠나지 않았고 지성(至誠)으로 모셔 왔다. 

그런데, 15년(年前)부터는 시부(媤父)님께서 특유(特有)의 노환(老患)으로 병상(病床)에 눕게 되었는데 배설물(排泄物)이 잔뜩 묻은 침구(寢具)나 의복(衣服)의 세탁(洗濯)은 마을 공동(共同)빨래터에서는 할 수 없어, 700m나 떨어진 하류(下流)의 위천까지 내려가서 해야 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세면(洗面)을 시켜 드리고 있으며,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不便)해 보이면 백방(百方)으로 좋다는 약(藥)을 구(求)하는 길에 나서기를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이렇게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시부모(媤父母)님 모시기를 30여년(餘年), 지금 86세(歲)의 시부(媤父)님과 80세(歲)의 시모(媤母)님께서는 노환(老患)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하루 세끼의 식사(食事)를 거뜬히 하며 활동(活動)할 수 있을 정도(程度)로 정정(亭亭)하게 장수(長壽)할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이 극진(極盡)한 권여사(權女史)의 효성(孝誠)의 보람이라고 주위(周圍) 사람들은 입을 모아 칭찬(稱讚)해 마지않는다. 

실제(實際)보다 10여세(餘歲)나 더 늙어 보이는 권여사(權女史)는 힘겨운 고생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슬하(膝下)의 3남(男) 2녀(女)를 고등학교(高等學校)까지 훌륭하게 교육(敎育)시켜 자력(自力)으로 생활기반(生活基盤)을 닦게끔 하였다. 그 자녀(子女)들도 권여사(權女史)의 효성(孝誠)에 감화(感化)되었음인지, 부모(父母)에 대한 효심(孝心)이 대단하다고 하며 가세(家勢) 또한 점차(漸次) 향상(向上)해지고 있음은, 오로지 권여사(權女史)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과 꾸준한 근검절약(勤儉節約)과 개미처럼 일한 보람이라 하겠다. 

이는 쇠퇴일로(衰頹一路)에 있는 전통적(傳統的) 한국가풍(韓國家風)을 되살려 이어가는 표본(標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맏며느리로서 남편(男便)을 도와 가며, 30여년간(餘年間)이란 긴 세월(歲月)을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시부모(媤父母)님을 시봉(侍奉)하여 화목(和睦)한 가정(家庭)을 이루었으며 어려운 가계(家計)를 날품팔이로 재기(再起)시켰고, 자녀(子女)에게는 실천(實踐)으로 효교육(孝敎育)을 시킨 권여사(權女史)야말로, 한국고유(韓國固有)의 전통적(傳統的)인 진실(眞實)된 여인상(女人像)으로서 이웃의 칭송(稱訟)이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