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백정희(白正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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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1987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달성군 화원면
효부(孝婦) 백정희(白正姬) 41세

백정희(白正姬) 여사(女史)는 1965년(年) 19세(歲) 때 김토홍씨가의 종부(宗婦)로 출가(出嫁)하여 가난한 살림을 꾸려오며 신혼초((新婚初)부터 뇌성마비(腦性麻痺) 불구폐질자(不具廢疾者)로 기동(起動)이 불능(不能)한 시모(媤母)님의 병간호(病看護)를 맡게 되었다. 

와병(臥病)중(中)인 시모(媤母)의 대소변(大小便)도 받아내고, 조석(朝夕)으로 의복(衣服)도 갈아 입히고 음식(飮食) 또한 떠먹여야 하는 등 백여사(白女史)의 하루 일과(日課)는 오로지 시모(媤母)의 병(病)구완에 매달렸다. 

그러나 항상(恒常) 밝은 표정(表情)을 잃지 않고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하였다. 

그러나 시모(媤母)님께서는 3년간(年間)에 걸친 자부(子婦)의 정성(精誠)어린 간호(看護)도 아랑곳 없이 45세(歲)의 젊은 나이로 별세(別世)하였다. 

백여사(白女史)에 난감(難堪)한 시련(試鍊)이 또 닥쳤다. 홀로 된 장년(壯年)의 시부(媤父)님은 재혼(再婚)하여 새 시모(媤母)를 맞이하였는데 여러 가지로 간섭(干涉)이 지나치더니 가정(家庭)에 불화(不和)가 그칠 날이 없게 되어, 결국(結局) 백여사(白女史) 부부(夫婦)는 시부(媤父)와 별거(別居)하게 되어 남매(男妹)를 데리고 대구시내(大邱市內)로 이사(移徙)하였다.

직장(職場) 없는 남편(男便)과 날품팔이, 행상(行商) 등으로 그날 그날의 생계(生計)를 겨우 유지(維持)하고 있었다. 

그런데 2년(年)이 채 못되어 새 시모(媤母)는 살지 못하고 헤어지니 시부(媤父)님의 뜻에 따라 다시 시댁(媤宅)으로 들어와서 어럽게 살던 어느 날, 이번에는 장녀(長女)가 갑자기 신열(身熱)이 대단한 열병(熱病)을 앓게 되었다. 그러나 역경(逆境) 속이라 돈이 없어 병원치료(病院治療)를 못한 채 집에서 정성(精誠)껏 가료(加療)하였으나, 별효험(別效驗)도 못보고 끝내는 농아자(聾兒者)로 만들고 말았다. 또 16세(歲)의 시동생이 시모님의 병세와 같은 뇌성마비로 10년의 고생(苦生) 끝에 사망(死亡)하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이번에는 남편(男便)이 또 시모(媤母)와 시(媤)동생과 똑같은 병세(病勢)로 뇌성마비(腦性麻痺)를 앓게 되니 운명(運命)치고는 너무나 짖궂었다. 병원(病院)에 입원치료(入院治療)하여도 별다른 효험(效驗)이 없어서 달리 백방(百方)으로 정성(精誠)껏 가료(加療)하였으나 역시(亦是) 차도(差度)는 없었다. 

그 위에 남편(男便)은 신경질적(神經質的)으로 백여사(白女史)를 구타(毆打)하는 등 행패(行悖)가 날로 심(甚)하여졌으나, 꾹 참으면서 남편(男便)의 심정(心情)을 애써 이해(理解)하며 가화(家和)에 한 치의 소홀(疎忽)함도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格)으로 이번에는 16세(歲)의 외아들이 교통사고(交通事故)로 사망(死亡)하였다. 

비통(悲痛)과 좌절감(挫折感)으로 미칠 듯하여 한 때 좌절(挫折)과 실의(失意)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간신히 다시 정신(精神)을 가다듬자 이번에는 시부(媤父)님께서 또다시 위장병(胃腸病)으로 와석(臥席)하니, 입원(入院)시켜 생명(生命)을 구(救)하기까지 초인적(超人的)인 효성(孝誠)을 다하였다. 

결혼(結婚)한 지 22년(年) 동안 너무도 많은 고난(苦難)과 시련(試鍊)을 겪으면서 이에 굴(屈)하지 않고 어려운 살림을 이끌어오면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답(畓) 460여평(餘坪)을 매입(買入)하는 등, 억척스러운 여인(女人)으로서 또한 부모(父母)에 대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만인(萬人)의 모범(模範)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