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김금분(金今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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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1987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상주시 연원동
효부(孝婦) 김금분(金今分) 28세

김금분(金今分) 여사(女史)는 넉넉지 못한 가정(家庭)에서 태어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와 어려운 잡언 살림을 꾸려가며 초등학교(國民學校)를 졸업(卒業)하고 19세(歲)때 중매(仲媒)로 윤오달씨와 결혼(結婚)하였다. 

시가(媤家)역시 농토(農土)도 얼마 안되고 산중턱의 움막집에서 남편(男便)의 막노동(勞動)으로 생계(生計)를 이어가는 몹시 가난한 생활(生活)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비단같이 고운 이들 부부(夫婦)는, 신혼(新婚)초기(初期)부터 하루 4~5000원의 날품팔이를 하면서도 행복(幸福)하게 살았다. 그런데 결혼(結婚)한지 1개월(個月)만에 60세(歲)인 시모(媤母)님이 갑자기 중풍(中風)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즉시(卽時) 병원(病院)으로 모셔가 진찰(診察)한 결과(結果) 고혈압(高血壓)으로 인(因)한 중풍(中風)이었다. 

그러나 하루 수만(數萬)원의 입원비(入院費)를 그들은 감당(堪當)할 길이 없어, 하는 수 없이 퇴원(退院)시켜 집에서 김여인(金女人)이 직접(直接) 간호(看護)하게 되었다. 

조석(朝夕)으로 음식(飮食)을 정성(精誠)껏 마련하여 때맞추어 드리고, 의복은 깨끗이 빨아서 갈아입혀 드리며 대소변(大小便)을 치우고 목욕(沐浴)도 매일(每日)시켜 드리는 등 그야말로 지성(至誠)으로 모셨다. 

그러면서 틈틈이 날품팔이로 생계(生計)를 유지(維持)해 가고 있었으므로 홀로 계시는 친정(親庭) 부친(父親)의 병환(病患) 소식(消息)을 듣고도, 시모(媤母)님의 병(病)구완으로 몸빠질 틈을 못내어 가보지는 못하고,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로 뺨을 적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다. 그러던 중 틈을 내어 시모(媤母)님의 구환(救患)은 부군(夫君)에게 부탁하고, 친정(親定)아버지의 약(藥)을 지어 달려가 며칠 동안 간호(看護)에 정성(精誠)을 바쳤더니 회복(恢復)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後) 친부(親父)께서 다시 위독(危篤)하시다는 급보(急報)를 받고 달려갔으나 이미 운명(殞命)하신 뒤였다. 생각하면 너무도 불쌍한 아버지였기에 사무치는 설움에 목을 놓아 울었다. 이 기막힌 정경(情景)을 지켜본 동네 사람들은, 외롭게 돌아가신 그의 부친(父親)도 가련(可憐)하지만 지극(至極)한 김여인(金女人)의 효성(孝誠)에 하늘도 무심(無心)하였음이 원망스럽게 생각되었다 하며, 동네 사람들이 장례(葬禮)를 치러 주었다. 

김여인(金女人)은 동리(洞里) 사람들의 정의(情誼)와 호의(好意)에 무한(無限)한 감사(感謝)의 눈물을 흘리면서 시가(媤家)로 돌아왔다. 고마운 친정(親定) 동네의 후은(厚恩)에 보답(報答)하는 뜻에서라도 더욱 열심(熱心)히 일하고 와병중(臥病中)인 시모(媤母)님에게 더욱 정성(精誠)을 쏟아 시봉(侍奉)하였다. 10km나 떨어진 식당(食堂)의 종업원(從業員)으로 일하면서도 시모(媤母)님의 시봉(侍奉)에는 조금도 변(變)함이 없었다. 

얼마 전(前)부터 남편(男便)이 허리를 다쳐 막 노동(勞動)을 할 수 없게 되니, 시모(媤母)님의 구환비(救患費), 3남매(男妹)를 둔 생활비(生活費)와 힘에 겨운 부채(負債) 등 마음의 부담(負擔)은 더욱 커졌으나, 굳건한 의지(意志)로 이를 극복(克服)하는 김여인(金女人)은 오늘도 시모(媤母)님의 간병(看病)과 3 남매(男妹)의 뒷바라지의 손길은 여전(如前)히 바쁘기만 하다.

김금분(金今分) 여사(女史)를 둘러싸고 있는 시가(媤家) 동네, 친가(親家) 동네, 그리고 상주시내(尙州市內)의 인근(隣近)에서는 그를 ‘현대판(現代版) 심청(深靑)'이라고까지 하면서 그의 효성(孝誠)을 격찬(激讚)하고 있으며, 아울러 생활력(生活力)이 굳세니 ’억순이‘라고까지 부르며 칭찬(稱讚)해 마지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