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강분심(姜粉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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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1987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주시 휴천3동
효부(孝婦) 강분심(姜粉心) 59세

강분심(姜粉心) 여사(女史)는 10남매(男妹) 중의 4녀(女)로 태어나 어려운 가정환경(家庭環境)에서 자라 1942년(年) 16세(歲)의 어린 나이에 최교일씨와 결혼(結婚)하여 영주시(榮州市)의 외곽지(外廓地)인 속칭(俗稱) ‘지누이 산골’ 동네에 와서 평생(平生)을 고생(苦生)스럽게 살았으면서도 지극(至極)한 효심(孝心)만은 지칠 줄을 몰랐다. 

시부모(媤父母)와 남편(男便) 모두 네 식구(食口)의 단출한 가솔(家率)으로 산골마을에서 살았다. 

가난하였기 때문에 시집오자 곧 연약(軟弱)한 여자(女子)의 몸으로 농사(農事)일을 도우면서 산(山)에서 땔감도 하면서 살았다. 

워낙 가난하였기에 때문에 좀처럼 가세(家勢)는 좋아지지 않고 자식(子息)들만 하나 둘 늘어갔다. 

시집온 지 10년(年)이 되던 해에 남편(男便)은 빈궁(貧窮)함을 벗어날 길이 없어 훌쩍 집을 떠나고 말았다. 

혼자의 몸이 된 강여사(姜女史)는 마음을 굳게 가지고 팔순(八旬)의 노시부모(老媤父母)님을 모시고 7남매(男妹)를 거느리며 농사(農事)일을 하는 한편 행상(行商)을 하여 가계(家計)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자신(自身)이 배우지 못한 것을 한탄(恨歎)하여 7남매(男妹)들을 피눈물나는 고투(苦鬪) 끝에 고등학교(高等學校)까지 교육(敎育)을 시켜냈으니, 그 고통(苦痛)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그렇게 살아오던 중 1972년(年) 시부(媤父)님께서 지병(持病)이던 중풍(中風)으로 자리에 눕게 되고 기동(起動)을 할 수 없게 되니, 환자(患者)에 대한 시봉(侍奉)이며 약(藥)값이며 정말 감내(堪耐)하기 힘든 형편(形便)이었으나 원래(元來)착하고 효심(孝心)이 지극(至極)한 강여사(姜女史)는 고생(苦生)스러움을 조금도 내색(內色)하지 않고 전심전력(全心全力)오직 시부(媤父)님의 구환(救患)에 열중(熱中)할 뿐이었다. 

좋은 약(藥)이라면 무엇이든 어디이든 가리지 않고 구(求)하여 드리고 대소변(大小便)을 보살펴 드리는 등 병(病)구완에 성력(誠力)을 다 쏟았다. 

그러나 이런 정성(精誠)의 보람도 없이 6년(年) 동안의 신고(辛苦) 끝에 시부(媤父)님은 별세(別世)하셨다. 

거기에다 2년(年) 뒤인 1980년(年)에는 시모(媤母)님이 시부(媤父)님의 뒤를 이어 중풍(中風)으로 눕게 되시니, 운명(運命)을 한탄(恨歎)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현실(現實)이였기에, 모든 것을 체념(諦念)하고 효(孝)만이 내가 할 바라고 깊이 새기고 지성(至誠)으로 시모(媤母)님을 받들기에 최선(最善)을 다해 오고 있다. 

강여사(姜女史) 자신(自身)도 이미 59세(歲)의 노령(老齡)임에도 장이 서는 곳이면 새벽같이 행상(行商)을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와서는 병상(病床)의 시모(媤母)님의 의복·음식·목욕·시탕 등의 태산(泰山)같은 간병(看病) 일을, 아무런 불평(不平)도 없는 듯 말없이 웃는 얼굴로 지성(至誠)으로 시봉(侍奉)하고 있다. 

남편(男便)의 버림 속에서 7남매(男妹)를 거느리고 와병중(臥病中)인 노시부모(老媤父母)님을 모시고 불평(不平)없이 인고(忍苦) 속에서 40여년(餘年)을 살아온 의지(意志)의 여인(女人), 이제는 백발(白髮)이 성성한 노인(老人)이 된 강여사(姜女史)! 

그 어느 누구도 그의 효성심(孝誠心)과 피맺힌 한 평생(平生)에 대해 칭송(稱誦)과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