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김우연(金又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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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1987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대구직할시 남구 봉덕동
효부(孝婦) 김우연(金又連) 39세

역경(易經)을 극복(克服)하고 꿋꿋이 살아가는 효부(孝婦)이며 이웃을 위하는 선행(善行)에 헌신적(獻身的)으로 앞장선 기수(旗手)가 있으니 그가 바로 김우연 (金又連)이다. 

중농가(中農家)의 3남(男)‘4녀(女) 중의 셋째 딸로 태어난 김여사(金女史)는, 그다지 고생(苦生)을 모르고 자라서 22세(歲)때에 최인식씨와 중매(中媒) 결혼(結婚)했다. 

당시(當時) 시댁(媤宅)은 지금도 거기서 살고 있지만 영세민(零細民) 밀집지역(密集地域)인 속칭(俗稱) ‘삼정골’에 있었으며 무허가(無許可) 건물(建物) 21평(坪)에 방(房) 3간(間)을 넣은 판자(板子)집에다 시조모(媤祖母), 시부모(媤父母), 시숙(媤叔), 시매(媤妹) 5명(名) 등 모두 열 식구(食口)의 대가족(大家族)이었는데 남편(男便)이 골프장(場)에서 잡노동(雜勞動)으로 벌어들이는 것이 수입(收入)의 전부(全部)였기에 생활(生活)이 몹시 어려웠다. 

맏며느리인 김여사(金女史)는 ,시모(媤母)님을 도와 밥상보를 만들어 파는 일 대가족(大家族)의 뒷바라지와 90 고령(高齡)의 노시조모(老媤祖母)님의 시봉(侍奉)등으로 정신(精神)없는 틈에 힘드는 줄 모르고 나날을 지냈다. 김여사(金女史)는 결혼(結婚)하면서부터 비로소 고생(苦生)이란 것을 체험(體驗)하게 되었고, 효(孝)라 는 것도 꺠닫게 되었다 한다.

곤경(困境)을 헤쳐가며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던 중(中) 남편(男便)이 군(軍)에 입대(入隊)하게 되니 가정형편(家庭(形便)은 더욱 말이 아니었고 외롭고 고통(苦痛)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굴하지 않는 의지(意志)력(力)과 독실(篤實)한 신앙(信仰)심(心)으로 생활고(生活苦)를 극복(克服)하고 가정(家庭)의 화목(和睦)을 위해서도 앞장섰으며 꼭두새벽부터 자정(子正)이 넘도록 노력(努力)하면서 남편(男便)의 제대(除隊)를 손꼽아 고대(苦待)하며 살아왔다. 

군복무(軍服務)를 마치고 제대(除隊)한 남편(男便)이 운전기사(運轉技士)로 취업(就業)하여 가계(家計)에 보탬하고 김여사(金女史)는 실질적(實質的)인 가장(家長)을 역할(役割)을 하면서 그런 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시부(媤父)님께서 정말 감당(堪當)하기 어려운 위암(胃癌)으로 병상(病床)에 눕게 되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해졌다. 

김여사(金女史)는 그럴수록 더욱 마음을 굳게 다짐하고 정성(精誠)으로 구환(救患)에 전력(全力)하였다. 

남편(男便)이 벌어들이는 수입(收入)이 있긴 하였으나 대식구(大食口)의 생계(生計)는 여전(如前)히 어려웠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시부(媤父)님의 병환(病患)으로 더욱 가계(家計)는 기울어졌어도, 있는 효심(孝心)을 다 쏟아 간병(看病)을 했으나 끝내 시부(媤父)님은 별세(別世)하고 말았다. 

그 위에 고령(高齡)인 시조모(媤祖母)님도 심장병(心臟病)과 약간의 정신이상(精神異常)으로 몸져 눕게 되었다. 

만삭(滿朔)이 된 김여사(金女史)는 시조모(媤祖母)님을 등에 업고 이 병원(病院)과 저 약방(藥房)으로 심지어 기도원(祈禱院)까지 헤매면서 구약(救藥)과 시탕(侍湯), 정성(精誠)어린 기도(祈禱)등으로 구환(救患)에 심혈(心血)을 기울였다. 

병세(病勢)는 5년(年)이란 세월(歲月) 동안은 별진전(別進展)이 없었다가 김여사(金女史)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에 기적(奇蹟)이라도 일어난 듯 90 고령(高齡)인데도 점차(漸次) 정상적(正常的)으로 건강(健康)을 되찾게 되니, 주위(周圍)에서는 그 손부(孫婦)의 효성(孝誠)이 출천(出天)한 보람이라고 칭찬(稱讚)이 자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