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김부돌(金夫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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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1987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대구직할시 동구 미대동
효부(孝婦) 김부돌(金夫乭) 47세

김부돌(金夫乭) 여사(女史)는 1963년(年) 25세(歲) 되던 3월(月)에 오수근씨(吳守根氏)와 결혼(結婚)했는데, 시부모(媤父母)와 시매(媤妹) 2명(名)이 사는 당시(當時)의 시댁(媤宅)은 농토(農土)한 마지기 없는 찢어질 듯한 가난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끼니를 굶다시피한 어려운 시집살이임에도 불평(不平)한 마디 없이 남편(男便)을 도와 가며 품팔이와 이웃의 굿은 일들을 해 가며 겨우 끼니를 때우기가 일쑤였다. 

김여사(金女史)가 결혼(結婚)한 지 3개월(個月)이 되던 그 해 6월(月) 시부(媤父)님께서 노환(老患)으로 병상(病床)에 눕게 되니, 가난한 가운데서도 좋다는 약(藥)은 두루 구(求)하여 시탕(侍湯)하며 온갖 정성(精誠)을 다 쏟았으나, 그런 구환(救患)의 보람도 없이 시부(媤父)께서는 3개월(個月) 뒤인 9월(月)에 별세(別世)하니 자식(子息)으로서 봉친(奉親)의 정성(精誠)이 부족(不足)했던 탓이라고 매섭게 자책(自責)하면서 애통(哀痛)함을 다하고, 가난은 하지만 예(禮)를 갖추어 장례(葬禮)를 지내니 온 동민(洞民)의 칭송(稱頌)이 자자(藉藉)하였다. 

농한기(農閑期)에는 팔공산(八空山)에 올라가 산채(山菜)를 뜯고 남편(男便)과 같이 나무를 하여 20리(里)나 되는 불노동(不老動) 시장(市場)에 내다 팔아 식량(食糧)을 마련하는 등 각고(刻苦)의 노력(努力)으로 곤경(困境)을 헤쳐가며 생계(生計)를 이어갔다. 

이처럼 극난(極難)한 가정(家庭)살이 임에도 불구(不拘)하고 시(媤)집 온 지 20년간(年間)이나 흘렀으나 한결같이 홀 시모(媤母)님을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하였고, 슬하(膝下)에 4남매(男妹)를 두어 어려운 가운데서도 훌륭히 교육(敎育)시켜 왔다. 

1984년(年) 봄부터는 시모(媤母)께서 노환(老患)으로 병상(病床)에 눕게 되고 기동(起動)을 할 수 없게 되니 시모(媤母)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극진(極盡)히 간호(看護)함에 한 치의 소홀(疎忽)함도 없었다. 

시모(媤母)님과 기거(起居)를 함께 하면서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고 환자(患者)의 더러워진 의복(衣服)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빨아서 평소(平素)때보다 더 자주 갈아 입히고 침구(寢具)도 자주 갈아 드리고, 냄새가 배기 쉬운 환자(患者)방의 청결(淸潔)까지 정성(精誠)을 다하였다. 

이와 같이 궂은 일 힘 드는 일에 눈코 뜰 새 없고 고되기 그지없었으나, 얼굴을 찌푸리거나 귀찮다는 표정(表情)을 짓는 일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병(病)구완의 효성(孝誠)은 이렇듯 만 3년(年)이나 계속(繼續)되었으나 한결같았으며, 어려운 생활(生活)속에서도 좋다는 약(藥)의 시탕(侍湯)과 지극(至極)한 봉양(奉養) 또한 다를 바 없었으니 주민(住民)들이 효행(孝行)을 칭찬(稱讚)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려운 살림살이 가운데서도 항상(恒常) 밝은 표정(表情)으로 시모(媤母)님을 마음 편(便)하시도록 마음에서 우러나는 효성(孝誠)을 쏟는 김여사(金女史)야말로 날로 핵가족(核家族時代)의 삭막(索莫)한 세태(世態)로 흐르는 현대사회(現代社會)에서는 보기 드문 효부(孝婦)이요 모든 이의 귀감(龜鑑)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