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강명순(姜名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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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1987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대구직할시 서구 비산5동
효녀(孝女) 강명순(姜名順) 15세

어려운 가정환경(家庭環境)속에서 병고(病苦)에 신음(呻吟)하는 아버지를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간호(看護)하고 한편으로는 파탄(破綻) 직전(直前)에 놓인 가정(家庭)이 재생(再生)할 수 있는 계기(契機)를 마련한 소녀(少女)가 있으니, 그가 여중(女中) 2년생(年生)인 강명순양(姜名順孃)이다.

성격(性格)이 온순(溫順)하고 학교(學校)의 모든 일에 솔선수범(率先垂範)하며 급우(級友)들에게는 신망(信望)이 두터운 강양(姜孃)은 , 아버지는 철공소(鐵工所)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파출부(派出婦)로 일하여 벌어들이는 소득(所得)으로 비록 가난은 했지만 그런 대로 행복(幸福)하게 부모(父母)의 사랑을 받으며 고교생(高校生)인 오빠와 우애(友愛)있게 잘 지냈다. 

그러하던 강양(姜孃)의 가정(家庭)에, 4년전(年前)인 1984년(年) 그가 초등학교(國民學校) 6학년(學年)때, 그의 아버지가 뇌출혈(腦出血)로 쓰러지면서부터 불행(不幸)은 닥쳤다. 

그래서 이 병원(病院) 저 병원(病院)을 전전(轉轉)하다가 모병원(某病院)에 입원(入院)하여 뇌수술(腦手術)을 받았으나 별효과(別效果)가 없었는 데다 2년전(年前)부터는 양(兩)다리 마비(痲痺)로 기동(起動)마저 불가능(不可能)하게 되어 다시 입원(入院)을 하게 되매 가산(家産)은 기울 대로 기울어지고, 강양(姜孃)은 병원(病院)에서 아버지 간호(看護)를 맡아야만 했다. 

대소변(大小便)도 받아 처리(處理)해야 했으며 좁은 3등병실(等病室)에서 이런 여학생(女學生)으로서는 감당(堪當)하기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적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며 식사(食事)까지 제대로 못 먹으면서도 오직 아버지 간호(看護)에만 전념(專念)했으나, 병세(病勢)는 악화(惡化)되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는데, 진료비(診療費)가 자꾸 밀려서 부득이(不得已) 강제퇴원(强制退院)을 당(當)하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집에서 물리치료(物理治療)를 하게 되었는데, 어머니의 파출부직(派出婦職)으로 생계(生計)를 이어가는 형편(形便)이라 강양(姜孃)은 하교(下校)하자 집에서 곧바로 식사준비(食事準備)며 세탁(洗濯)이며 가사(家事)일을 모두 다해야 했으면서도 아버지의 손발이 되어 지성(至聖)으로 간호(看護)를 했다. 

이 소문(所聞)을 들은 이웃들은 ‘현대판(現代版) 효녀(孝女) 심청(沈淸)’이라고 격찬(激讚)했으며 이를 돕기 위하여 성금(誠金)도 모았다 한다. 

가정환경(家庭環境)이 더욱 어려워지자, 고교(高校) 재학(在學)중(中)인 오빠가 학교(學校)를 그만두고 공장(工場)에 나가 가계(家計)를 돕겠다고 했을 때는, 강양(姜孃)이 아버지의 지금 병세(病勢)는 절대안정(絶對安定)이 필요(必要)하다는데, 오빠가 그 생각을 강행(强行)한다면 그 충격(衝擊)으로 인(因)하여 병세(病勢)가 더욱 악화(惡化)될 것이 분명(分明)하고 오빠의 장래(將來)를 위해서도 그럴 수가 없다고 눈물로 호소(呼訴)하자, 강양(姜孃)의 정성(精誠)에 감동(感動)한 오빠는 동생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고쳐 가졌다 한다. 

어린 나이로 감당(堪當)할 수 없으리만큼 벅찬 일을 해 낼 수 있었고, 어른스러운 마음이 들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심(孝誠心)에 하늘이 힘을 주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이 갸륵한 효행(孝行)은 진실(眞實)로 오늘의 청소년(靑少年)들의 귀감(龜鑑)이 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