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김홍식(金弘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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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1987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고령군 다산면
효자(孝子) 김홍식(金弘植) 62세

김홍식씨(金弘植氏)는 빈농(貧農)인 김정수씨(氏)의 4남매(男妹) 중(中)의 차남(次男)으로 태어났다. 

당시(當時)의 가정형편(家庭形便)은 침수답(沈水畓) 1,200평(坪)과 소작농(小作農) 600평(坪)으로 일곱 식구(食口)가 근근(僅僅) 살아가는 어려운 가정형편(家庭形便)이어서 부친(父親)은 막노동(勞動)을 하며 도시(都市)에 나가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 남매(男妹)는 모친(母親)과 함께 조부(祖父)님의 슬하(膝下)에서 자라났다. 

조부(祖父)님의 엄격(嚴格)한 훈도(薰陶)와 효행(孝行)을 으뜸으로 치는 가훈(家訓) 속에서 자란 김씨(金氏)는 어릴 때부터 효성(孝誠)의 싹이 터 있었다. 

김씨(金氏)의 형(兄)은 가난함이 한(恨)이 되어 단신(單身) 일본(日本)으로 떠났다. 따라서 가장(家長) 아닌 역할(役割)을 말게 되고, 천성(天性)이 효성(孝誠)스러웠던 김씨(金氏)가 17세(歲) 되던 7월(月) 중순(中旬) 큰 장림(長霖)과 홍수(洪水)로 물천지(天地)가 되던 어느 날, 대구(大邱)에 나가 있는 그의 부친(父親)이 피부병(皮膚病)으로 고통(苦痛)이 심(甚)해 약(藥)으로 소태나무를 원(願)한다는 연락(連絡)을 받고 즉시(卽時) 구(求)해서 바로 가져 가려고 낙동강(洛東江) 사공(沙工)에게 도강(渡江)을 청(請)했다. 

그랬더니 홍수(洪水)로 위험(危險)하여 못 가겠다고 불응(不應)하므로 강물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을 때, 그의 조부(祖父)가 오셔서 사강(沙江)에게, 이 아이가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를 하려는 일이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 과(過)히 걱정 말고 건네 주라고 하자 거절(拒絶)할 수가 없어서 건네니 과연(果然) 무사(無事)하였다. 

그 길로 40여리(餘里)를 걸어 부친(父親)을 구환(救患)하니 완쾌(完快)되었다 한다. 간혹(間或) 그의 동생이 조부(祖父)님의 뜻에 충실(忠實)히 따르지 않을 때에는, 조용히 타일러 행실(行 實)을 바로잡는 데도 신경(神經)을 썼다 한다. 

세월(歲月)은 흘러 형(兄)이 귀국(歸國)하여 분가(分家)하게 되어 가산관계(家産關係)로 문제(問題)가 있었을 때도, 그는 아무런 불평(不平)도 않고 형(兄)에게 순종(順從)하는 형제(兄弟)간(間)의 우애(友愛)도 베풀었다. 

조부(祖父)님에 대한 봉양(奉養)은 비(比)할 바 없이 지극(至極)하였으나, 조부(祖父)께서 76세(歲)에 별세(別世)하니 예(禮)를 좇아 비통(悲痛)속에 장례(葬禮)를 치르고 3년(年) 동안 매일(每日)같이 성묘(省墓)하였다. 

모친(母親)이 84세(歲)에 별세(別世)하시고 부친(父親) 또한 1985년(年)에 별세(別世)하시니 애통(哀痛)함을 다하고 효성(孝誠)이 부족(不足)하여 일찍 돌아가시게 했다고 자신(自身)의 불행(不幸)을 자책(自責)하며 3년간(年間)을 매일(每日) 성묘(省墓)하였다. 

부친(父親)의 묘소(墓所)에 밤마다 찾아갔는데, 하루는 난데없이 서광(瑞光)이 비치더니 백발노인(白髮老人)이 나타나서 “너의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니 후일(後日) 반드시 큰 복(福)을 받을 것이다.” 하고는 홀연(忽然)히 사라졌다.

본인(本人)은 물론(勿論), 온 동민(洞民)이 이상(異常)한 일이라고 지금껏 소문(所聞)이 파다하다. 이는 참다운 효(孝)의 실천자(實踐者)에게 하늘이 베푼 기적(奇蹟)이 나타났다 하겠다. 

김홍식씨(金弘植氏)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객지(客地)에 나가 공부하고 싶은 향학(向學)의 욕심(慾心)도 누르고 농사(農事)를 지으면서 조부(祖父)님의 수족(手足)이 되고 때로는 벗이 되어 드리면서 효행(孝行)을 다하고 죽음을 무릅쓴 도강(渡江)으로 부친(父親)에게 효행(孝行)하고 부친(父親)이 별세(別世)하신 후(後)에도 매일(每日)밤 묘소(墓所)를 찾아 생전(生前)에 못다한 효행(孝行)을 바쳤다. 

이는 진정(眞正)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산 교훈(敎訓)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