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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농가(農家)에서 태어나 평소 부모(父母)에게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고, 어른을 공경(恭敬)하고 형제간(兄弟間)에 우애(友愛)가 두터운 예의(禮儀)바른 모범(模範) 대학생(大學生)이 있으니 그가 곧 영남대학교(嶺南大學校)에 재학중(在學中)인 김상준(金相準君)이다.
20여년간(餘年間)을 삯바느질로 생계(生計)를 꾸려오던 모친(母親)이 지난 1984년(年) 1월(月)추운 겨울의 어느날 삯바느질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오던 중 고혈압(高血壓)으로 쓰러져 병원(病院)에 입원(入院)하여 뇌수술(腦手術)까지 받게 되었으나, 결국(結局)은 중풍증세(中風症勢)로 일어나지 못하고 병석(病席)에 눕고 말았다. 약(約) 2개월(個月) 동안의 입원치료(入院治療)를 받고 퇴원(退院)을 하려니 당장 진료비(診療費) 청산(淸算)이 막연(漠然)하였다.
평소(平素)에 모친(母親)이 푼푼이 저축(貯蓄)한 돈으로는 태부족(太不足)하여 고심(苦心)하던 끝에, 이웃과 동민(洞民) 그리고 친척(親戚)의 도움으로 퇴원(退院)은 할 수 있었으나, 가계(家計)는 완전(完全)히 기울어지고 생계(生計)는 더욱 암담(暗澹)해졌으며, 학비(學費) 마련의 방도(方途)는 너무나 막연(漠然)하여졌다. 그러나 좌절(挫折)하지 않고 이웃의 따뜻한 인정(人情)과 친척(親戚)들의 성의(誠意)에 보답(報答)하기 위해서나 쓰러져가는 가정(家庭)을 일으키기 위해서도 굳건히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自己)가 다니는 대학(大學)의 구원(救援)님을 찾아가 가정사정(家庭事情)을 털어 놓았더니, 선뜻 방과(放課)후(後)의 일자리를 마련하여 주었다.
근로장려학생(勤勞獎勵學生)으로 묵묵(黙黙)히 일하면서 학교(學校) 일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모친(母親)의 병(病)구완과 시봉(侍奉)에 전심전력(全心全力)을 기울였다.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고 목욕(沐浴)을 시켜 드리고 오물(汚物)이 묻은 의복(衣服)의 빨래를 하면서, 어머님 곁에서 간병(看病)에 심혈(心血)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소아마비(小兒痲痺)에 간질병(癎疾病)까지 겸(兼)하여 28세(歲)가 되도록 시집을 못 가고 불구자(不具者)로 평생(平生)을 같이 살아야 할 누나를 가슴 아파하며 위로(慰勞)하고 마음을 상(傷)하지 않게 보살피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누나의 딱한 처지(處地)를 가엾게 생각하고서, 푼푼이 모은 돈으로 옷가지며 양말 등을 사다주고 있다. 동기간(同氣間)의 우애(友愛)가 이렇듯 두터우니 주위(周圍) 사람들이 감탄(感歎)하지 않는 이가 없다.
김군(金君)은 지난 3년간(年間)을 모친(母親)의 병간호(病看護)에 온갖 정성(精誠)을 쏟았으니 회복(恢復)의 기미(氣味)는 보이지 않고 악화일로(惡化一路)에 있어, 자식(子息)된 도리(道理)를 다하지 못함을 평생(平生)의 한(恨)이 될까 고민(苦悶)하면서 모친(母親)의 회춘(回春)을 기원(祈願)하면서 오늘도 자신(自身)의 학업(學業)과 모친(母親)의 구환(救患), 그리고 불구(不具)인 누나의 뒷바라지에 눈물겨우리만큼 여념(餘念)이 없다.
이처럼 모친(母親)에게는 출천지효자(出天之孝子)요, 동기(同氣)에게는 두터운 우애(友愛)가 있고 이웃과 친척(親戚)에게는 은혜(恩惠)를 알고 보은(報恩)을 항상 염두(念頭)에 두고 살며, 학교(學校)에서는 모범학생(模範學生)이고 가정(家庭)에서는 가사(家事)일이며 세대주(世帶主) 역할(役割)을 다 하는 김군(金君)이야말로, 오늘도 살아가는 모든 젊은이의 본보기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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