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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윤귀 여사의 시댁은, 조선 인조조 예학의 대가로서, 성주 오암서원 봉향된 죽헌 최항경 선생의 후예이다. 곽여사의 자택이 있는 수륜면 남은동은 속칭 '법산마을'이라 하는데, 산수가 수려하며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백여호(戶)가 거의 영천최씨인 집성촌이다.
조선 후기부터 많은 명현달사가 배출되어, 이곳에 세거하는 최씨를 세칭 법산최씨로 회자될 정도이며, 문풍(門風)·가절(家節)이 훌륭하기로 이름난 마을이다. 이렇게 예절바른 마을에서 효부 칭송을 받고 있는 곽여사의 효행을 누구나 다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겠다.
곽윤귀 여사는 1922년 고령군 쌍림면 월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온순한 성격에다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예절 바르고 효성이 지극한 규수로 자라 이웃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아 오던 중 21세가 되던 해, 부모님의 뜻을 좇아 영천최씨 가문의 최석한씨와 결혼하였다. 가난한 살림살이긴 했지만, 시부모님을 효성으로 모시고 남편을 공경하면서 그런 대로 단란한 가정살이를 영위해 왔다.
그런 가운데 세월은 흘러 어느덧 시집온 지 10년이 되었다. 그 동안 시부모님을 정성껏 모시기에 선현의 가르침을 좇아 동온이하처(冬溫而夏淸)하고, 혼정이신성(昏定而晨省)하며, 출필고(出必告)하고 반필면(反必面)함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고, 더구나 시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모시는 데 한결같이 효성을 다하여 왔는데, 시부모님이 노환으로 그만 병상의 몸이 되니, 곽여사는 불철주야로 간병에 지성을 다하여 시봉은 물론이거니와 음식·의복·목욕 등에 이르기까지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정화수를 떠놓고 신명에게 시모님 환후의 쾌유를 기도하였다.
그렇게 극진한 병구완의 보람도 없이 시모님은 끝내 타계하시고야 말았다.
곽여사는 자신의 효성이 부족했던 탓으로 돌려 이를 개탄하고, 생전에 못 다한 효성을 깊이 후회하면서 애통 속에 초종장례를 엄숙히 치르고 난 뒤, 빈소에 조석상식과 삭망전도 정성을 다하였다. 그 후 외로이 지내는 시부님의 무료함을 덜어 드리기 위해서, 자주 화제를 만들어 외로움을 달래 드리기도 하면서, 시모님의 생전보다 의복이며 용돈이며 신발에 이르기 까지 추호의 불편함도 없도록 더욱 세심하게 성력을 다하였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신념으로 살아온 곽 여사는, 모든 일에 걸쳐 시부님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노력하고, 가사의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시부님의 뜻에 따랐기 때문에, 가정은 항상 평온무사하기만 하였다.
6년 전 그러니까 시부님이 97세 되던 해에, 노령의 탓인지는 몰라도 우연히 하지가 불편하시다더니 기동이 어려운 상태가 되매, 온갖 약과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 시봉하여도 병세는 조금도 차도가 없으므로, 이는 오로지 자신의 봉친(奉親)의 정성이 모자란 소치라고 자책하면서 더욱 간병에 심혈을 기울였다.
자신도 벌써 고희를 눈앞에 둔 고령이면서도, 40여년을 한결같이 지극한 효성으로 시봉하였던 것이다. 시부인 최옹이 타고난 천운이 그러했다손 치더라도, 현재 고금에 드물게 103세(현재 수륜면에서는 최고령)란 장수를 누리는 것은 곽여사의 숨은 독실한 봉양의 결과라 하며, 지켜보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1986년 11월에는, 수륜면 남은동에 거주하는 영천최씨 문중에서 면내 최장수 노인에 대한 예우와 효행이 지극했던 곽여사의 행적을 높이 치하하기 위하여, 시부인 최병곤옹의 백수연을 베푼 바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외지에 거주하는 많은 문중 사람들을 위시하여 이곳 주민들이 운집하여, 최옹의 송수(頌壽)와 곽여사의 숨은 효행을 높이 치하함과 아울러, 곽여사의 효행심을 본받게 하는 산 교육장이 되게 하는 계기로 삼기도 하였다.
한편 휘하 6남매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도 어머니 곽여사의 효심에 은연중에 감화되어, 하나같이 착하고 효성있는 사람으로 성장하여, 현재 4명은 출가하였고, 남은 두 자녀도 남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이는 곽여사가 쏟은 남다른 정성의 보람이겠지만, 여사가 실행한 말없는 교화의 결과라 믿을 때, 참으로 장하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출천의 효부 곽여사를 두고, 이웃 사람들이 그의 효행은 실로 타의 모범이라고 극구 칭송하면 할수록, 본인은 다만 인자의 도리를 이행했을 뿐이라고 오히려 무안해 하면서 사뭇 겸손해 마지않았다. 이처럼 절대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무언실행하는 그의 진실한 인간성에는 인근주민들은 감루(感淚)를 금치 못하겠다고 한다.
40여 성상(星霜)을 인고의 그늘 속에서, 시부모에게는 효행을 다하고, 남편을 공경하며 오로지 가정의 화목에 전력하고 자녀들에게는 실천교육으로 효심을 일깨워, 그야말로 효도하는 가정으로 만들기에 헌신한 곽여사야말로, 한국의 전통윤리의 복고(復古)와 그 실행을 묵묵히 앞장서서 이끌어 온 유례가 드문 표상으로서, 만인의 존경과 흠모의 표증으로 그 행적을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길이길이 효행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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