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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1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6남매의 맏딸로서 집안 살림살이를 맡아서 하느라고 국민학교에도 다니지 못한 윤분녀(李粉女) 여사(女史)는25세 때 홍순갑씨와 결혼했다.
시댁도 역시 산간벽촌의 어려운 가정이라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가는 형편이었다.
윤여사(尹女史)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굳은 의지로 경사진 산지를 개간해서 6백평의 화전(花田)을 일구어 농사를 짓게 되어 겨우 호구(糊口)하게 되었으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시아버지가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쳐 눕게 되었다.
그래서 윤여사(尹女史)는 시아버지(媤父)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좋다는 온갖 약을 구해다 허리에 부이기도 하고 달여 잡수시기도 했으나 좀체로 회복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渦中)에 1953년 남편이 군(軍)에 입대하게 되었다.
남편이 군에 입대하자 어려운 살림살이가 더욱 어렵게 되자 남의 땅 8백평을 소작하고 산을 개간해서 밭을 만들며 갖은 피나는 노력을 했으나 겨우 호구(糊口)하기에 바빴다.
그러던 중, 1965년 남편이 군에서 제대했으나 훈련 도중 왼쪽 팔에 총상(銃傷)을 입어 힘드는 일은 할 수 없게 되었고 시아버지의 허리도 완전하게 낫지 않아 역시 힘드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시부모님과 시동생 2명 그리고 자녀 3명 모두 아홉 식구의 대가족이 살아갈 수가 없어 남편은 태백시 철암에 일자리를 구해서 그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태백시에서도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윤여사(尹女史)는 날품팔이를 하고 막노동을 해서 가계(家計)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했으나 뜻 밖에도 1970년 남편이 감전사고(感電死故)로 불구의 몸이 되자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부산으로 가고는 그 후 소식을 모르게 되자 기다리다가 다시 검성리로 돌아와 살고 있다.
자녀들은 장성해서 도시로 나가고 시아버지는 아픈 허리와 가슴앓이로 가벼운 노동도 못할 뿐 아니라 거동하기도 어려워지자 윤여사(尹女史)의 책임은 더욱 무거워졌다.
어려운 가정을 꾸려가면서 시아버지의 병구원(病救援)을 해야 하는 윤여사(尹女史)는 모든 고난을 혼자 짊어지고도 묵묵히 역경(逆境)을 헤쳐나가고 있다.
이러한 윤여사(尹女史)의 노력과 효행(孝行)을 인근주민(隣近住民) 모두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극찬(極讚)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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