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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이(金順伊) 여사(女史)는 1960년 22세 때 오세화씨와 혼인하여 시부모님과 시삼촌 내외 그리고 시동생 2명 등 9명의 대가족이 한 집에 살면서도 재산이라고는 불과 열마지기의 논밭 뿐인 가난한 집안 맏며느리로서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가정의 평온을 지켜온 효부(孝婦)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여건 속에도 시삼촌 내외에게 농토의 절반을 나누어 본가를 시키고 살림살이가 더욱 어려웠지만 천성이 착하고 온순한 김여사(金女史)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소득이 높은 작물인 시설 참외농사를 지어 연간 3~4백만원의 수익금을 올려 가정을 더욱 넉넉하게 하고 시동생 두 사람을 공부시켜 훌륭한 사회인으로 배출했다.
이렇게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그녀 앞에 불의의 변고가 생겼다.
1985년 1월에 남편이 중추신경 마비로 눕게 되었다.
남편이 눕게 되자 남편의 병구완(病救援)도 하는 한편 농사일도 해야 하고 약값도 마련해야 하고 김여사(金女史)는 밤낮으로 쉴 사이가 없었다.
그래서 몸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김여사(金女史)는 있는 힘을 다하여 남편의 병구완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2년반 뒤인 87년 7월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을 여윈 슬픔도 슬픔이지만 81세의 시아버지(시부(媤父)와 82세인 시어머니를 여자의 몸으로 봉양(奉養)해야할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녀는 굳은 의지로 역경(逆境)을 이겨 나가야 한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82세의 시어머니는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식사의 시중을 들어야 하고 대소변 길을 안내해야만 하니까 집을 비울 수가 없는 형편이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막내 시동생 부부가 80년 9월과 10월에 불치병(不治病)으로 연이어 사망했기 때문에 고아가 된 조카(6세)와 질녀(9세)를 집으로 데려다가 양육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경로효친사상이 투철한 김여사(金女史)는 수년 전부터 사랑방을 동네 노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제공하고 시아버지와 동네 노인들이 모여 즐겁게 놀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주고 자주 술과 안주를 내놓는 등 동네 며느리 역할도 하고 있다.
이러한 김여사(金女史)의 효성(孝誠)에 감복한 마을사람은 입을 모아 칭송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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