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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숙(盧貞淑) 여인(女人) 어릴 때부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일을 도우면서 살았는데 23세 때 부모님의 정혼(定婚)으로 김종규씨(金鍾圭氏)와 혼인했으나 시댁 역시 가난해서 시조모님과 시부모님을 모실 수가 없어 남편과 의논해 노동여건이 좋은 대구로 옮겼으나 아무런 기술도 없이 막노동과 허드레 일을 해 가면서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의 생활비조로 매월 6만원씩을 보내 드리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 이듬해, 고향에 계시던 시아버지께서 병세가 악화되어 돌아가시게 되었다.
노여인(盧女人) 부부는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것을 크게 뉘우치고 고향에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9순의 시조모(媤祖母)님의 하반신 마비로 거동이 불편하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도 농토는 단 한 평도 없으니 남편은 날품팔이를 하고 그녀는 남의 집 일을 도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남편은 이웃사람의 주선으로 소작(小作) 농사를 짓게 되고 노여인(盧女人)은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생활형편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대구에 있는 시동생도 어렵게 살면서 시어머니를 모시겠다고 모시고 갔으나 하반신이 마비된 시할머니의 봉양(奉養)을 위해서 노여인(盧女人)은 성심성의(誠心誠意)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다.
노여인(盧女人)은 일하는 집에서 주는 점심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아 그것을 가지고 집에 혼자 계시는 시할머니께 가져다가 드리고 본인은 굶거나 식은밥이 있으면 한술 뜨기도 했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 주인집에서 아예 시조모님의 식사를 따로 마련해 주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처음엔 비웃고 핀잔을 주다가 나중에는 그의 효심(孝心)에 감복하여 격려하고 칭찬해주니 노여인(盧女人)은 더욱 지극정성으로 시할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시할머니를 손수레에 태우고 동네를 다니면서 옛날을 회상(回想)하게 하고 때로는 4km가 넘는 자인(慈仁)시장까지 모시고 가서 구경시켜 드리고 시할머니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는데 온갖 정성(精誠)을 다하고 있다.
이렇듯 가난하게 사는 살림살이면서도 한결같이 시할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노여인(盧女人)의 지극한 효성(孝誠)이야말로 젊은 여성들의 귀감(龜鑑)이 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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