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강정분(姜正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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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1989년 4월 20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점촌시 윤직동
효부(孝婦) 강정분(姜正粉) 52세

어려서부터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동네 어른들에게도 예절 바르게 자라 온 강정분(姜正粉) 여사(女史)는 30여년 전에 양가(兩家)어른들의 정혼(定婚)에 따라 남편 손육원씨(孫六遠氏)와 혼인(婚姻)하게 되었다.

시가(媤家)에는 시어머니와 사별(死別)한 시아버지(媤父)와 나이 어린 시동생 두 사람 그리고 남편이 함께 살고 있었으나 집안 살림이 너무 어려워 보리강죽을 먹고 살았다.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가는 형편인데 결혼한지 1년도 채 못되어 남편이 군(軍)에 입대하게 되어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강여사(姜女史)가 돈을 벌지 않으면 식구들이 연명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새색시의 체면을 다 팽개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웃집 농사일을 품팔이 하고 산나물을 뜯어다가 팔고 콩나물을 길러 시중에 파는 등 몸을 아끼지 않고 노력했으며 근검절약(勤儉節約)해서 그 지독한 가난을 조금은 물리치게 되었다.

그러나 가난은 조금 면했지만 혼자 계시는 시아버지가 늘 마음에 걸렀다.

그래서 혼자 외롭게 살아가시는 시아버지의 외롭고 쓸쓸함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한 강여사(姜女史)는 시아버지를 설득해서 지금의 새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가정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새시어머니와 함께 밤낮으로 삼베를 짜고 누에를 치고 소, 돼지를 기르고 나물장사, 꿀장사 등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그리하여 논 8백평을 사들여 생전에 처음으로 농민이 된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막내 시동생이 서울의 대학에 입학하게 되자 시동생의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서 자작농은 물론이고 소작(小作)하는 한편, 이웃집 농사 품팔이 그리고 농한기(農閑期)에는 새끼를 꼬는 등 불철주야(不撤晝夜)노력해서 그 당시 농촌사정으로는 엄두도 못낼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2남 5녀의 자녀들도 교육시켰다.

특히 10여년 전부터 새시어머니께서 지병(持病)인 위장병의 악화로 병상에 눕게 되자 시어머니를 업고 병원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좋다는 약은 다 구해서 극진히 간호한 결과 지금은 거의 완쾌(完快)되었고 시동생들도 사회의 일꾼으로 활약하고 있어 향리(鄕里)의 사람들은 모두 강여사(姜女史)의 효심(孝心)을 칭송해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