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박정교(朴貞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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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1989년 4월 20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영주시 가흥동
효부(孝婦) 박정교(朴貞嬌) 39세

박정교(朴貞嬌) 여사(女史)는 예천군 감천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 일을 돕다가 1974년 그녀의 나이가 스물 네 살 때 남편 이창근씨와 결혼해서 영주(永州)로 온 사람이다.

출가한 남편의 집 또한 농토 9백평과 허술한 집 한 채뿐인 가난한 집이라 늙은 시부모(媤父母)님과 두 자녀 모두 여섯 식구의 생계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4년 후에 뜻하지 않게도 남편이 병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남편이 성해도 살기가 어려운데 남편이 병들어 눕게 되자 박여사(朴女史)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2년 동안 백방으로 좋다는 약은 다 써보고 정성껏 간호했으나 효험은 커녕 병은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반신불수가 되어 거동마저 할 수가 없게 되어 대소변을 받아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늙으신 시부모님도 노환으로 또 몸져 눕게 되었다.

한 가정에 세 사람이나 환자가 누워 있는데 그녀 혼자서 생계를 꾸려가면서 환자를 돌보아야 하니 도저히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박여사(朴女史)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좌절(挫折)하지 않고 억척같이 일을 하면서 시부모님과 남편의 병 간호(看護)에 전심전력(全心全力)을 다했다.

박여사(朴女史)는 남몰래 속 울음을 속 눈물을 흘려도 시부모님이나 남편 앞에서는 물론이고 남들 보는 앞에서는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명랑하게 살아왔다.

박여사(朴女史) 자신은 언제나 청렴(淸廉)하고 검소(儉素)한 자세로 옷 한 벌 제대로 사입지 않지만 시부모님과 남편에게는 언제나 깨끗한 옷을 갈아 입혀 드리고 환자 세 사람의 시중을 들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불편한 내색을 하는 일이 없다.

물론 박여사(朴女史)는 천성이 순박하고 어렸을 때부터 가난이 몸에 배어 어떠한 역경에도 좌절(挫折)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意志)가 있겠지만 속마음은 슬프고 괴로우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박여사(朴女史)야말로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으로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나라 고유의 윤리도의(倫理道德)가 날로 쇠퇴(衰退)해가는 오늘날 효행과 열행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파수병(把守兵)이라고 할 수 있으니 향리(鄕里)의 원근(遠近)에서 박여사(朴女史)에 대한 청송이 자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