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이말조(李末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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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1989년 4월 20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경북 달성군 현풍면
효부(孝婦) 이말조(李末祚) 60세

이말조 여사는 명문가인 성산이씨의 후예로 1930년 고령군 고령읍 본관동에서 아버지 이석훈씨와 어머니 김춘화 여사의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유순하고 행실이 착하고 단정하여 부모님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면서 자랐다.

이여사는 1950년 봄, 스무살의 나이로 달성군 현풍면 지리에서 아버지 김수만씨와 어머니 박두아 여사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병희씨와 혼인하게 되었다.

남편은 서흥김씨로 동방오현의 수현이시고 이기론을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 형성의 근원을 이룩한 도학지종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종파 후손이다. 대대로 많은 유현을 배출하고 특히 효문으로 알려져 있다. 18대조 언숙을 위시해서 출천지대효로 효행천으로 출사하여 사적에 기록되어 있는 선조만 하더라도 6명이나 되며 그 밖의 효행도 대대로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이여사가 혼인한지 5개월 만에 6.25전쟁이 발발하여 남편은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당시는 신행준비 관계로 반년간 친정에서 머무는 풍습이 있었다. 그 해 8월에 출정한 남편은 3개월만인 11월 24일 평안북도의 전장에서 전사하였다.

이 비보를 접하게 된 이여사는 한때 실신해서 쓰러지기도 했으나 정신을 가다듬어 눈물을 머금고 여필종부 죽음으로써 남편의 뒤를 따르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 먼 길을 걸어서 시가를 찾아 신행길에 올랐다. 아들을 잃은 시부모님의 애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슬펐고 식음을 폐하고 실신상태에 있었으나 남편을 여의고 시집에 온 자부의 비통한 심정을 헤아려 시부모님들은 의연하려고 애를 썼으나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신랑이 처가에 세 번 밖에 다녀가지 않았기 때문에 미처 열흘도 함께 살지 못한 남편이지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해서 앞날이 암담하고 갈바를 몰랐으나 이여사는 이러한 모든 것이 주어진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냉정을 되찾아 도리어 시부모님을 위로하였다.

그리하여 가문의 명예와 평소에 닦은 부도를 좇아 양심과 이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여생을 김씨문중의 7대 봉제사를 맡은 종부로서 희생해야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였다. 이렇게 각오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집안 살림살이가 매우 가난한데다 식구는 많고 또한 찾아오는 손님도 많아 시부모님을 봉양하고 접빈객하면서 살림을 꾸려가기가 여간 어렵고 힘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부모님이 인자하시고 시동생과 시누이도 모두가 착해서 집안이 화목하고 서로 도우고 아끼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한결 마음이 놓이고 견디기가 수월했다.

평소에 늘 상복을 입고 있는 자부를 마음속으로 가엾게 생각하고 있는 시부모님의 마음을 읽고 있는 이여사는 시부모님을 대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남편이 없으니까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시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남편이 있는 사람보다 더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고 삼가 해야 하고 혹시 시부모님께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이 앞서는 것이었다.

이러한 괴로움보다 더 이여사를 괴롭히는 것은 주위의 사람들이 개가하라고 권유하는 일이었다. 친가의 장질이 고모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서 개가를 권유했을 때에는 크게 꾸짖고 친기를 제외하고는 일체 친정걸음을 하지 않고 발길을 끊었다. 그 밖의 주위 사람들이 개가를 권유하면 양가의 가문을 존중하여 충신은 불사이군이요, 열녀는 불경이부라는 한 마디로 일축하고 말았다.

형제들 또한 우애가 돈독하여 형수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모든 일을 도왔으며 이여사 또한 시동생과 시누이가 장성해서 혼인하고 분가하고 출가할 때에 모든 것을 양보하고 원하는 대로 후의를 베풀어 형제간에 재물로 마음 상하는 일이 없도록 했으니 남은 재산은 겨우 천수답 몇 마지기 밖에 남지 않았다.

시아버지의 성격이 외강내유해서 때로는 크게 꾸짖어도 천성이 유순하고 정숙한 이여사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다만 묵묵히 순종할 뿐이었다. 이여사는 조카와 조카딸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알뜰하게 거두어 길렀고 시동생 병돈씨의 차남 창용군을 양자로 맞아 들여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귀여운 손자를 보고 외로운 종부의 만년을 의탁하게 되었다.

세월은 흘러 시아버지께서 노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이여사는 동분서주 좋다는 약을 구해다가 달여 드리고 늘 옆에서 불편함이 없도록 온갖 시중을 들면서 지극정성으로 3년 동안 불철주야 병구완을 했으나 1971년 봄에 시아버지께서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나시게 되자 아침 저녁으로 진상 호곡하면서 3년 동안 애통해 마지 않았다.

이제는 이여사 자신도 이순의 나이가 되어 반백이 되었지만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시모를 극진히 모시고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다.

동족상잔의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신혼의 새색시가 동거생활도 해보지 못한 채 남편을 싸움터에서 잃고 평생을 외롭게 혼자 살면서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시고 시동생과 시누와 화목하게 지내고 시아버지의 병간호에 온갖 정성을 다하고도 돌아가신 뒤 3년 상의 예를 갖추어 치르고 생존하신 시어머니를 시봉하는 이여사의 굳은 절개와 효행과 희생정신은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될 것이다. 

요즘 세상 젊은이 가운데에는 혼인하자 이내 이혼하고 자식을 두고 살다가도 헤어지고, 남편이 죽으면 돌아서서 개가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여사야말로 꽃다운 나이를 바쳐 한 세상 자신의 인생을 불사른 효와 열의 화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