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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순(崔鳳順) 여사(女史)는 금릉군 지례면의 가난한 농가의 4남매 중 태어나 자라면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1927년 22세 때 성주군 금수면의 박성규씨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자식도 재산도 없는 삼촌댁으로 남편이 양자(養子)를 가게 되어 시양부모님을 모시게 되었다.
전답 한 평도 없는 농촌에서 식구가 한 사람 느는 것도 어려운데 시양부모님을 모시게 되어 나물죽으로 연명해 가면서도 최여사(崔女史)는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고 극진히 두 어른을 모시었다.
1935년 3월에 시양아버지(시양부媤養父)께서 돌아가시자 최여사(崔女史)는 자신의 불효한 소치라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대성통곡했고 3년 동안 시양아버지의 빈소에 조석으로 밥상을 차려놓고 명복을 빌었으니 이를 본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시양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양어머니(媤養母)를 더욱 극진히 모셔 왔는데 1974년 남편의 외출하고 집에 없는 사이에 시양어머니께서 급환(急患)으로 위독했을 때 최여사(崔女史)는 4km나 되는 험한 길을 시양어머니를 업고 달려가서 입원 치료하면서 이틀 밤 사흘 낮을 뜬 눈으로 옆에서 간호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
가정 형편이 극빈한데도 최여사(崔女史)는 시양어머니를 극진히 봉양(奉養)해 왔는데 1985년부터 79세의 고령과 정신쇠약으로 거동이 불편해서 자리에 눕게 되자 식사를 떠먹이고 대소변을 받아 내는 등 병간호(病看護)를 하면서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좋다는 약을 구해오고 봄가을에는 직접 들판을 헤매고 험한 산에 올라가서 약초를 채취해서 달여 드리고 하면서 정성껏 간병(看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내색하지 않고 시양어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즐겁게 해 드리려고 있는 힘을 다한다.
최여사(崔女史)가 몸소 효행(孝行)을 실천함으로써 슬하의 4남매도 무언 중에 감화(感化)되어 모두가 효자이고 착하다고 한다.
최여사(崔女史)도 이제는 63세의 할머니가 되었다.
슬하에 아들과 손자 손녀를 두고 편안하게 살아갈 나이인데도 아직도 하루 세끼의 식사 시중과 대소변을 받아 내고 있으니 그 출중(出衆)한 효행(孝行)은 자랑스러운 한국의 여인상(女人像)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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