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김순남(金順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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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1990년 4월 20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달성군 화원면 천내리 194
효부(孝婦) 김순남(金順南) 42세

김순남(金順南) 여사(女史)는 대구시내에서 출생하여 1969년 21세 때 금릉군 구성면의 농촌 청년 우홍구씨와 결혼했다.

당시 시가(媤家)는 전답이 불과 800여평 뿐인 영세농가로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 가면서도 만성적인 신경통에다 오래 전부터 귀가 들리지 않는 시어머니(媤母)를 봉양(奉養)하면서 살아가야 했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만성적인 신경통 때문에 약값과 치료비 등으로 돈이 많이 지출되어 가정형편이 더욱 어려워져 갔다,

김여사(金女史)는 여러 가지 궁리하다가 마침내 남편과 의논하여 고향(故鄕)을 떠나 지금 거주하는 달성군 화원면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온갖 고생 끝에 나름대로의 생활 터전을 닦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는데 8년 전에 태산같이 믿었던 남편이 뜻밖에도 방광염(膀胱炎)에 걸려 눕게 되자 김여사(金女史)는 온갖 약을 구해다가 정성껏 간호했으나 마침내 신장(콩팥)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김여사(金女史)는 시어머니의 간병(看病)에도 힘이 드는데 남편의 병간호도 해야 하고 4남매의 양육과 교육비를 마련해야 하니까 실로 눈물겨운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김여사(金女史)는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병구완(病救援)을 했으나 이러한 보람도 없이 남편의 병증상은 더욱 악화되어 끝내는 방광암으로 발전하게 되어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김여사(金女史)는 월 5만원의 사글세 방 두칸으로 이사하고 마을에 있는 소규모 직조공장의 공원으로 일하게 되어 월 17만원 상당의 수입금으로 시어머니의 고질적인 만성신경통 약값과 남편의 병원비(病院費) 그리고 자녀들의 양육비와 교육비를 충당(充當)해야 하니까 그 고통은 말할 수 없게 어려웠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김여사(金女史)는 원래 유순한 성격인데다가 인내심(忍耐心)이 강하고 의지가 굳은 사람이라서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모든 것은 자신이 부덕(不德)한 탓이라고 자책(自責)하면서 역경(逆境)을 헤쳐나가고 있다.

낮에는 공장에 나가서 일하고 밤에는 지친 몸을 쉴 사이도 없이 시어머니와 남편의 병구완을 하면서 4남매의 어머니로서 자녀교육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김여사(金女史)의 헌신적인 노력과 효행(孝行)을 보고 지역사회의 모두가 멀지 않아 복(福)받을 거라고 입을 모아 칭찬하고 있다.